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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종교 개혁의 배경 2

by 우연!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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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살피다 보면 비슷한 시기에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어떤 강한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의 시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교회 내부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외부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며 유럽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났고, 인문주의가 발달했습니다.

또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지식이 축적되고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럽 사회에서 점차 차오르고 있던 압력이 터진 것 같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종교 개혁입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결과적으로 복음이 급속도로 전해질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사상

14~16세기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되살려

사람 중심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데,

신이 중심이 되었던 중세 시대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상의 중심이 사람이라고 보고, 사람에게 이로운 학문이나

기술, 예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고전 학문과 문화를 재확인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화두 아래,

중세 시대의 전통적 기준에 의문을 제기해 나간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지중해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로마의 문화 유산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에 의해 침략을 당한 비잔티움 제국의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되면서 그리스의 철학과 예술, 그리스어(헬라어) 성경 등

그리스 문화가 전해졌습니다. 많은 자료와 학자들이 가까운 이탈리아로 유입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유럽 사람들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고전 문헌과 예술을 탐구하며 인간의 삶에 대해 사색하는 인문주의가 싹트게 되었습니다.

 

먼저 예술 영역에서는 기존과는 다른 작품들이 쏟아졌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화가나 조각가들은

인간과 자연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묘사한 소설 <데카메론>을 남긴 보카치오나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들입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16세기 이후, 르네상스는 알프스 이북의 유럽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봉건주의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는

현실 사회와 교회를 비판하는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인간 사회와 자연에 대한 관심은 과학의 발달로 이어졌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천동설이라는 전통적 관념을 깨고

지동설을 주장했던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지동설은 그동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도

 

당시 인문주의를 나타내는 말 중에 ‘데모크라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현대어로 민주주의라고 번역되지만, 풀어서 표현하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의미합니다.

로마는 고대 그리스의 인문주의를 계승한 제국이었지만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데오크라시’, 곧 신본주의 개념이 더해져 신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한계를 넘어서면 새로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다신교 사회에서

하나의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유일신 사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의 뜻을 전한다는 이들이 잘못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잘못된 교리가 전통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는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반발로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중심이었던 시대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문주의를 신을 배제하고 사람만을 중시하는 무신론 사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의 인문주의는 사람을 중심으로 바라보자는 것이지 신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의 대부분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근본이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 있다고 보았고,

중세 신학자들의 권위나 스콜라 철학의 성경 해석들은 성경이 가진 권위에 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사도 시대의 소박함과 생명력을 회복한 기독교’였습니다.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을 가장 신뢰할 만한 원전을 바탕으로 연구하여 확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서유럽 전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불가타 성경의 라틴어 번역문을,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후 확보된 헬라어 성경 필사본과 꼼꼼히 대조하며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불가타 성경의 번역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516년에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이자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는 헬라어-라틴어 신약성경을 편찬했습니다.

이 성경은 헬라어와 라틴어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서 내용을 쉽게 대조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성경이 편찬되자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 헬라어 원본과 다른 부분을 두고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그중 한 예는 마태복음 4장 17절의 “회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불가타 성경에는 ‘참회’로 되어 있는데, 에라스무스는 ‘회개’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의미의 두 단어로 인해 논쟁이 일어난 이유는 가톨릭에서 성도들이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근거로 이 구절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라스무스의 번역대로라면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는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습니다.

 

에베소서 5장 32절에 있는 “비밀”이라는 단어의 해석에도 차이가 났습니다. 불가타 성경에는 ‘비적’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에라스무스는 ‘비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비적’은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한 기독교 예식을 말하는 것으로, 세례 성사나 고해 성사, 혼인 성사 등을 가리킵니다. 즉 이 구절을 근거로 교회에서 이러한 의식을 행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말해 왔는데, 에라스무스는 이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헬라어-라틴어 신약성경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가톨릭 교리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제들이 행하는 잘못을 보며 비난했는데, 그 비난의 근거가 제공되자 사람들은 과연 초대 교회 때에는 어떠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성경을 통해 현재의 가톨릭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 등의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확실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성경 원전을 토대로 각 나라말로 성경이 번역되면서 사람들은 자기 언어로 성경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와 함께 진행되었던 종교 개혁의 구호는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

독일과 스위스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 개혁에 호응하고, 새로운 움직임이 빠른 속도로 번져 갔던 이유 중 하나는 일반인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비교해 나가게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때 종교 개혁의 최전선에 있던 이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인쇄해서 보급하는 일을 가장 먼저 실행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이 당시 종교 개혁 사상의 확산에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축적된 지식을 전파하는 방법이 필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대한 내용을 옮겨 적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사람이 글자를 하나하나 옮겨 적다 보니 원본과 달라지는 실수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똑같이,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쇄술은 빠른 시간에 보급되었는데, 유럽 350개의 도시에 50년 동안 천 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이를 통해 수많은 다양한 책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보급되었고,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 인쇄소를 연 것은 1448년의 일입니다. 이때 구텐베르크가 가장 먼저 인쇄한 것은 면벌부였습니다. 1454년에는 성서를 인쇄해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성경이 대중에게 보급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인쇄된 면벌부

 

구텐베르크 42행 성경(1454~1455)

 

 

1516년에는 에라스무스가 새로 개정하여 발간한 헬라어-라틴어 성경이 인쇄되었고, 1517년에는 루터가 낸 ‘95개조 반박문’도 인쇄되어 배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는 제후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보호하면서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인 힘을 실어 주었던 그 바탕에 인쇄술의 발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

 

이후 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루터는 숨어 지내는 동안 에라스무스의 헬라어-라틴어 성경을 참조하여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발간했고, 1526년에는 여덟 개의 언어에 능통했던 옥스퍼드 학자 틴들이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 발간했습니다. 이 번역물들은 독일에서 인쇄되었습니다. 틴들은 독일에서 인쇄된 영어 성경을 영국으로 가져가 배포한 일로 인해 큰 핍박을 당하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가 번역한 성경은 그 후로 번역된 모든 영어 번역본 성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윌리엄 틴들의 신약성경

 

3. 신항로 개척

예수께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유럽의 서해안 끝에 도달한 뒤에는 복음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서양’이라는 장벽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세상에 대륙도 하나, 바다도 하나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에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고 기록된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지도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극동까지의 땅을 유일한 대륙으로 보았고, 이 대륙은 온통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 사람들 대부분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고 바다 끝까지 항해한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세의 T.O 지도

 

 

그런데 중세 시대 말엽 이슬람 세력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새로운 지식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랍의 지도 제작자들은 인도와 중앙아시아까지 직접 항해를 했는데, 이들의 경험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유럽의 지도 제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 시대 말엽에는 독일의 지도 제작자 마르텔루스가 제작한 지도가 사용되었습니다.

 

15세기에 독일의 지도 제작자 헨리쿠스 마르텔루스 게르마누스가 제작한 지도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

 

오스만 제국은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유럽 동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그 뒤 유럽과 극동을 잇는 주요 무역로였던 ‘실크 로드’를 차단했는데, 이는 유럽 전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실크 로드는 상인들이 인도와 극동에서 향신료, 비단 등 다양한 상품을 유럽으로 가져올 때 이용하던 길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실크 로드를 통해 온 비싼 상품들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실크 로드가 막히자 유럽인들은 이러한 상품들을 조달할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바닷길을 이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대항해 시대가 열렸습니다.

 

당시 많은 항해사들은 해안을 따라 무역로를 탐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항해 기술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항해사 대부분이 먼바다로 항해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안전하게 항해했습니다. 처음에는 지중해의 남쪽 해안을 따라 인도까지 가는 방법을 시도했고, 나중에는 해안을 따라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항해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항해사들의 천문 관측 기구인 ‘아스트롤라베’와 ‘자기 나침반’이 사용되었습니다. 아스트롤라베는 위도를 계산해 주는 최초의 기기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천문학에 사용하기 위해 발명한 이 기기는 이후 아랍인들에 의해 개선되어 발전했습니다. 아랍인들이 아스트롤라베를 개발한 이유는 기도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기기를 사용해 태양이나 별들의 위치를 관측하여 현재 시간과 위도를 알 수 있었고, 별들의 위치를 통해 지평선 상의 북쪽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나침반을 사용하면 구름이 태양과 별을 가리고 있어도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천체를 보고 항해를 해야 했던 당시 항해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6세기의 천문 관측 기구 아스트롤라베

 

 

높은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범선 ‘카라벨’도 개발되었습니다. 카라벨은 15세기 포르투갈에서 개발한 작은 범선으로, 맞바람을 가르면서도 놀라운 속도로 항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카라벨이 개발되기 전 포르투갈에서는 ‘카락’이라는 배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카락은 키가 높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상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거리 항해에는 카라벨이 더 적합했습니다.

 

피테르 브뤼겔의 그림에 묘사된 중세의 카락

 

존 캐벗의 카라벨 ‘매튜’의 복제품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삼 면이 해안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대항해 시대의 선두 주자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15세기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해상 왕자 엔히크’라고 알려질 만큼 해양 탐험에 많은 기여를 했기에 ‘대항해 시대의 시조’라고 불립니다.

 

해상 왕자 엔히크(1304~1460)

 

그 후 콜럼버스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서쪽으로 항해해서 인도 제도까지 갈 수 있는 항로를 찾고자 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인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극동을 통틀어서 인도 제도라고 불렀습니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기에 배를 타고 바다 끝까지 간다고 해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서쪽으로 가면 언젠가는 인도 제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콜럼버스는 본래 이탈리아 사람으로 포르투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를 찾아가 대서양 탐험을 제안했습니다. 주앙 2세는 해양 탐험에 관심이 많았고, 인도 항로를 찾아 남쪽과 동쪽으로 출발한 여러 탐험가들을 지원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왕과 여왕, 즉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은 국고를 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이 탐험을 통해 인도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하며 후원을 요청하자 그에게 배와 선원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도 2세

 

 

콜럼버스는 2개월 9일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 제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땅을 ‘서인도 제도’라고 불렀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사실 미국 플로리다와 쿠바 사이에 위치한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습니다. 그 후 콜럼버스는 남대서양을 세 번 더 항해했고 다른 항해사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들도 그 뒤를 따라나섰고, 결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남미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스페인 국기를 달고 항해했던 또 다른 항해사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있습니다. 그 역시 인도 제도를 찾아 나섰는데, 자신이 탐험한 땅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서 그곳을 ‘신대륙’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그 대륙은 그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4차 여정에서 상륙한 곳과 가까운 니카라과의 ‘아메리스케 산맥’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고, 존 캐벗의 항해를 후원했던 영국인 ‘리처드 애머릭’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애머릭은 영국 브리스톨의 주장관으로 헨리 7세의 재정 관리인이었습니다.

북아메리카를 횡단했던 존 캐벗은 제노바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조반니 카보토였습니다. 항해와 지도 제작을 공부했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향신료 무역을 하며 멀리는 메카까지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건너갈 때 북쪽 항로를 택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왕과 여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제시했으나, 스페인 왕실에서는 이미 콜럼버스를 후원하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후원자를 찾아다니던 카보토는 영국으로 가서 이름을 ‘존 캐벗’으로 개명한 후 헨리 7세를 찾아갔습니다. 헨리 7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항해사들의 활약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도 이 모험에 동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존 캐벗에게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존 캐벗(조반니 카보토, 1450?~1499?)

 

헨리 7세(1485~1509 재위)

 

 

영국 왕의 지원을 받은 존 캐벗은 1497년에 브리스톨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항해했고, 자신이 도착한 곳에 ‘뉴펀들랜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새로 발견한 땅(New Found Land)’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시작한 지 불과 5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존 캐벗은 콜럼버스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대서양을 건너는 데 성공했습니다. 단 4주 만에 항해를 마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 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존 캐벗의 북아메리카 항해 경로

 

그 후로 점점 더 많은 배들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오가게 되었으나 그 어떤 여정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항해사들은 인도 제도로 가는 더 쉬운 항로를 찾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탐험을 통해 그들이 발견한 땅은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발견의 시대’의 항로들. 15세기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유럽 국 가들이 항해, 탐험으로 해외 진출을 하던 시대를 ‘발견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신대륙 탐험의 배경에는 새로운 부를 추구하던 군주들이나 가톨릭교회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탐험의 이면에는 그 어떤 정의로운 동기도 없었습니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는 탐험의 결과로 무고한 생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일이 이어졌고, 수년간 학대가 벌어지는 가운데 노예 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 유다와 사마리아를 거쳐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하신 대로 이 복음의 역사가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대항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들을 사용하여 복음이 대서양 건너에 있는 땅에도 전해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탐험가들이 개척한 새로운 길을 따라서 훗날 모라비아 교도들과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며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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