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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계몽주의와 제국주의 시대에서의 복음 전파 2

by 우연!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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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에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과학은

절대 왕정 시기에 더욱 크게 진보했습니다. 이러한 과학의 발전은

‘과학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신의 섭리가 아닌 자연법칙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만연함에 따라 근대 철학도 발달했는데,

이를 토대로 인간이 이성에 의해 진보된다는 ‘계몽사상’이 등장했습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불합리한 제도와 전통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해외 선교

그러나 반대로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복음이 크게 부흥했고,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나가 널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다른 나라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여러 요건들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영국은 그 요건들이 충족된 국가였기에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 영국의 신앙 부흥 운동

 

처음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종교 개혁가들은 타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예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하신 말씀이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에게 한정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또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선택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영주가 선택한 종교가 자신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혹은 다른 영토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30년간 종교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졌고,

교회는 세속화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독일에서는

개인의 구원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는데,

그 과정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지도했던 슈페너의 제자 프랑케는

독일의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당시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덴마크의 왕은 프랑케를 찾아와

해외 선교를 지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래서 프랑케는 덴마크 왕실의 지원을 받아

할레 대학의 학생 두 명을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선교사로 보냈는데,

이것이 국외 선교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케의 제자로 친첸도르프 백작이 있습니다.

그는 외할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영지에 모라비아 형제단이 정착하도록 지원해 주었고,

모라비아 형제단은 그곳을 기지로 삼아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서인도 제도의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선교사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견했습니다.

친첸도르프 백작과 모라비아 형제단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으로

훗날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존 웨슬리가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웨슬리를 중심으로 복음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교파를 초월해 선교에 힘쓰고자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러 선교 협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은

18세기, 19세기에 해외 선교를 가장 많이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2) 경제적 풍요

 

해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음 지도에는 전 세계에 여러 속령을 두어 대영 제국이라고 불렸던

1920년대 영국의 영토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영국 본토의 크기는 한반도보다 조금 더 크지만 이 시기에 영국은

지구 전체 면적의 4분의 1을 식민지로 삼았고,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통치했습니다.

대영 제국 최대 영토

 

1913년 기준 대영 제국의 인구는 1억 2백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23%였다.

대영 제국이 차지했던 영토의 크기는 3,550만제곱킬로미터로,

지구 면적의 24%에 달했다.

 

작은 나라인 영국이 광대한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종교 개혁 시대인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을 다스릴 당시 유럽의 강대국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여러 나라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1588년에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고

승리하면서 영국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은 무기를 만들어 아프리카에 팔고,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사서 아메리카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노예들이 재배한 사탕수수나 목화, 커피와 같은 작물들을

유럽으로 가져와 비싼 값에 파는 삼각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대서양 삼각 무역

 

삼각 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 영국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산업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 혁명을 통해 기계가 발달하면서 물건을 저렴하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영국은,

물건을 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식민지 개발에 더욱 힘썼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이 더욱 활발해졌고,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또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패권 다툼에서 승리해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했습니다.

미국이 독립한 후에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중국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렇게 식민지를 넓혀 가던 영국은

1815년에 있었던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에 이르렀고,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이 되었습니다.

 

3) 항해술과 해군력

 

당시에는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이동하려면 선박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또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발달된 항해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에 영국인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증기선으로 먼 거리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영국은 자국의 배를 해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해군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증기 기관차 등 여러 기계들이 발명되고 전선이 개발되면서 통신도 발달하여

전보를 통해 먼 나라까지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평화로운 시대

 

복음이 널리 전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은 1815년에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약 100년 동안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를 ‘팍스 브리타니카’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에 영국의 선교사들은 전 세계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로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팍스 로마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평화의 시대가 2백 년간 지속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 영토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행정부의 공식 언어는 헬라어였고

상당수의 사람들도 헬라어를 사용했는데

바울은 헬라어에 능숙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

초대 교회 시대에 핍박 속에서도 복음이 널리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상 네 가지 요건이 18세기, 19세기 영국 사회에 갖추어졌기에

영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고고학의 발달

19세기에는 무신론이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한편으로는 성경에 기록된 고대 국가의 유적들이 잇따라 발굴되었습니다.

성경의 사실성을 의심하고 성경의 기록을

신화나 전설로 여기려는 무신론이 번져 나가는 시대에

성경이 실제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시리아(앗수르)의 실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의 폴 에밀 보타였습니다.

그는 티그리스강 유역의 모술에 파견된 프랑스 영사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앗수르의 니네베(니느웨)를 발굴하고자 했던 그는

1843년에 코르사바드 지역에서 앗수르 제국의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왕 사르곤 2세는 수도를 옮기고

그곳에 새롭게 궁전을 지었는데,

폴 에밀 보타가 그 궁전을 발굴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이 ‘사르곤의 요새’라는 뜻의 두르 샤루킨성으로,

현대 지명을 따서 코르사바드 유적이라고 부릅니다.

폴 에밀 보타(1802~1870)

코르사바드 유적의 궁전 문을 지키던 인간의 머리, 황소의 몸, 독수리의 날개를 단 수호신상

발굴 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다.

 

앗수르 유적의 위치

한편 영국의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도 주목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20대의 나이에 모술에 머물면서

1845년에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성을 발굴했습니다.

니느웨 유적은 코르사바드 유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로 인해 폴 에밀 보타가 먼저 발굴한 유적이

니느웨성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1817~1894)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발굴한 니느웨성은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산헤립이

수도를 니느웨로 옮기면서 건축한 성입니다.

이곳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남유다의 라기스성을 함락시켰던 모습을 새긴

라기스 전투의 부조가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니느웨 유적의 발굴 모습을 묘사한 그림

 

또 성경에 오스납발이라고 기록된

앗수르의 아슈르바니팔왕이 니느웨 궁전에 만든

도서관도 발굴되었습니다. 이곳에서 3만여 점의 점토판이 출토되었는데,

영국의 한 학자가 설형 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의 내용을 해독해 내면서

신화 속 나라로 여겨질 뻔했던 앗수르가

성경에 기록된 그 나라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또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1899년에 현재의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에서

느부갓네살왕이 건축했던 바벨론성을 발굴했습니다.

땅 밑으로 깊게는 30미터까지 파 내려가서 바벨론의 거대한 성을 발굴한 것입니다.

그때 바벨론성의 이슈타르 문을 옮겨 와

독일의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했습니다.

 

19세기에는 진화론이 발표되면서 무신론이 대두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고고학의 발달로 인해 성경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전 세계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에

성령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들

 

유럽 사회에는 17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계몽주의, 르네상스, 이신론, 진화론,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상과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게다가 산업 혁명이 일어나며 대영 제국은 날로 번영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점점 커져 빈곤이 극심했고,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도 많았으며 질병 또한 만연했습니다.

산업 혁명 시대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이주했지만

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도시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전해졌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는 분위기였지만,

복음의 빛은☆ 점차 세상에 퍼져 갔습니다.

 

1) 존 웨슬리

 

감리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웨슬리는 말을 타고 영국 전역,

즉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웨슬리는 들을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동했던 거리를 합산하면

지구를 열 바퀴 돈 것과 같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존 웨슬리(1703~1791)

 

한번은 웨슬리가 고향인 엡워스의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려고 했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방해를 했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을 위해 밖으로 나가

자기 아버지의 묘 위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묘는 웨슬리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가 그 위에 서서 설교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엡워스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에서 설교하는 존 웨슬리

또 그는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관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아일랜드를 오가는 항해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수감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웨슬리는 선교의 일을 도울 수 있도록 젊은 사람들을 훈련시켜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는 당시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사회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562년부터 1730년대 중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노예 무역 국가였던

영국의 노예 무역을 폐지하려는 청년 단체의 활동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2) 윌리엄 윌버포스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해 활동하던 단체의 리더는 윌리엄 윌버포스입니다.

그는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치인이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노예 무역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윌버포스는 뜻이 같은 사람들과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해 강하게 목소리를 내었는데,

‘클라팜 종파’라고 불리던 이 단체의 투쟁에 힘입어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 무역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클라팜 종파의 모임

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사회 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썼습니다.

‘극빈자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협회’를 발족했고

‘교회 선교회’와 ‘영국 성서 공회’도 발족했습니다.

노예 무역 제도가 폐지된 지 26년 후에는 마침내 ‘노예 해방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 해방령’이 선포되고 나흘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쳤던 사람이었습니다.

 

3) 존 뉴턴

 

노예 무역을 하다가 새 생명을 얻은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존 뉴턴입니다.

젊은 시절에 노예 무역선의 선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존 뉴턴(1725~1807)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타고 있던 배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정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구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후에 그는 선원 생활을 청산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이라는 제목의 찬송가 가사가 바로 존 뉴턴이 쓴 시입니다.

 

4) 윌리엄 캐리

 

윌리엄 캐리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시골 출신의 평범한 사람으로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린 나이였던 15세 즈음에 거듭났습니다.

윌리엄 캐리(1761~1834)

 

 

그는 구원받은 직후부터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의 삼촌은 캐나다를 오가며 자신의 여정에 대해 어린 윌리엄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그는 외국에 대한 책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읽으며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벽에 종이를 오려 붙여 세계 지도를 만들고는

지도의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탐구하는 데 기본이 되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또한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독학했습니다.

어떻게 해외로 나갈지는 알지 못했지만, 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장해서 목사가 된 그는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케터링의 한 마을에서 열린 작은 모임에 참석해

해외 선교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발표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외국에 나가 병원과 학교를 짓고,

각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그 나라의 사람들과 정말 가까워져서

복음을 전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일이라며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가서 일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인데,

전 세계에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케터링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날짜를 잊고 참석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도에 살며 무역 일을 하던 상인 존 토마스입니다.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거듭나 선교사가 된 그는

인도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을 찾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케터링 모임 다음 날 캐리를 찾아가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습니다.

후에 윌리엄 캐리는 존 토마스와 함께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로 가기까지 5개월의 여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벵골어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1834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인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세람포어 대학교(현재 캘커타 대학교)를 설립했고,

남편이 죽으면 살아 있는 아내를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 인도의 풍습

‘사티’를 폐지하기 위해 끝까지 싸워 이 풍습을 없애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섞여 사는 인도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인도의 여섯 개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외에 부분적으로 번역한 언어는 29개나 됩니다.

 

5) 런던 선교회

 

그 무렵 영국에는 다양한 선교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 ‘런던 선교회’가 있었습니다.

1795년에 출범하고 1818년부터 ‘런던 선교회’로 불린 이 선교회는 후에

‘세계 선교협의회’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런던 선교회’라고 불렸습니다.

런던 선교회의 대표적 인물인 에릭 리델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육상 종목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 후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간 그는 그곳에서 1945년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6) 데이비드 리빙스턴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탐험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아프리카에 갔던 주목적은 탐험이 아니라 선교였습니다.

리빙스턴 역시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였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 거듭난 후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원래 그는 중국에 가고 싶어 했으나 남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로버트 모펏을 만나

그로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

 

그 후 리빙스턴은 선교사로 나갈 것을 대비해 의학 공부를 했습니다.

의사가 되면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할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남쪽의 케이프타운으로 갔고

아프리카 내륙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북쪽으로 탐험했습니다.

그는 현재의 잠비아 치탐보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사망했습니다.

리빙스턴의 탐험 경로. 리빙스턴은 이 먼 거리의 대부분을 걸어서 다녔다.

 

7) 허드슨 테일러

 

중국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허드슨 테일러입니다.

그는 16살에 거듭난 후 하나님께서 자신이 중국에 가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하고는

중국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1832~1905)

 

 

그는 1854년에 ‘중국 선교회’로부터 파송된 첫 선교사로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자기와 대화하는 것조차 꺼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김새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가까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변발을 하고

중국 옷을 입는 등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중국인들과 소통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건강이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선교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기에

영국에서 중국의 동역자들을 지원하고자

중국 선교에 대해서 전하고 다녔습니다.

미국에 가서 D. L. 무디도 만났습니다.

 

무디는 테일러에게 자신의 교회에서

중국 선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절대로 기부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무디의 교회에서 중국 선교에 대해 전했을 때

무디가 교인들에게 기부금을 구하자, “저는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며 무디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무디 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테일러를 찾아와서

5천 달러 수표를 건넸습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어제 기부금을 요구했다면

저는 주머니에 있는 돈만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을 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테일러는 그 돈을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셨다고 생각해 기쁘게 받았다고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중국 내지 선교회’를 발족했습니다.

영국에는 이미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단체가 여럿 있었지만,

그는 중국 대륙의 모든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까지 중국 18개 성에 825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역이 이끌어 낸 결과였습니다.

 

8) 조지 뮐러

 

19세기 당시 영국의 모습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실제로 런던의 뒷골목에는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조지 뮐러(1805~1898)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 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했던 사람으로

조지 뮐러가 있습니다.

그는 거리의 고아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집이 없는 아이들에게 잠잘 곳을 제공했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에 기여하도록 교육하기 위한 큰 고아원도 여럿 지었습니다.

조지 뮐러가 세운 고아원의 스케치

 

9) 윌리엄 부스

 

뮐러가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는 동안

빈민들을 위해 일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세군(救世軍)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윌리엄 부스입니다.

그는 거듭난 사람들을 군대처럼 조직해서 길거리로 보내 가난한 사람들,

술 취한 사람들을 포함한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윌리엄 부스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도 복음을 전했는데,

당시에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한 부녀자들이 많았습니다.

윌리엄 부스(1829~1912)

 

 

거리에서 설교하는 윌리엄 부스

 

10) 찰스 스펄전

 

‘민중의 설교자’라고 불렸던 찰스 스펄전은

해외로 나가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 내에서 널리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써 일했습니다.

그는 1850년 15살의 나이에 구원받았고

17살에는 사람들에게 신앙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상담받던 사람이 거듭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깊은 바닷속에 들어가 진주를 건져 온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 경험은 그가 더욱 복음을 위해 전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19살이 되었을 때 그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가 설교하러 갔을 때에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그는 성경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설교 시간이 되자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낮에 있었던 그의 설교에 대한 소문이 퍼져

모두 그의 설교를 듣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해가 갈수록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결국 교회에서 그 숫자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런던에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이라는

큰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건물이 오늘날까지 있습니다.

그 안에는 5천 명을 위한 좌석 외에 5백 명이 서서 들을 수 있는

입석이 있었는데, 들어가려면 입장권이 필요했습니다.

돈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에서 설교하는 찰스 스펄전

 

 

스펄전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60개의 협회를 세우고

거리의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했습니다.

그 일을 맡을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도 세웠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지원하고자 책을 내며 자본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한 해에 네 권의 책을 출판할 정도로 매우 바쁘게 활동했습니다.

 

11) 레지널드 히버

 

레지널드 히버는 영국 성공회에 의해 인도로 파견되었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리랑카와 호주에도 다녀왔는데,

레지널드 히버(1783~1826)

 

해외 선교에 나서기 전 1819년에

찬송가 “저 북방 얼음산과”를 작사했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그 시대에 복음을 위해 힘썼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원본 가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위에서 온 지혜로 영혼에 빛을 받은 우리

어두움에 앉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 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구원 오 구원! 땅끝에 있는 나라들이 메시야의 이름 들을 때까지

이 기쁜 소식 전하자

이 인물들 외에도 영국에서 복음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교회 체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새로운 사상과 이론들로 더욱더 깊은 어두움에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참빛으로 인도하시면서

복음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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