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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종교 개혁의 배경 1

by 우연!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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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목적지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역사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는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런 것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흐름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피다 보면 비슷한 시기에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어떤 강한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의 시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교회 내부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외부에서는 유럽을 강하게 압박하는 이슬람 세력이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났고, 인본주의 사상이 발달했습니다.

사람들이 성직자나 교황의 말을 비판하는 사고력을 갖추게 되었을 무렵,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지식이 축적되고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차오르고 있던 압력이 터진 것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종교 개혁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복음이 급속도로 전해질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 내부의 문제

유럽의 교회는 중세의 천 년을 지나면서 많은 문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접하지 못하게 했고, 교회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성경의 교리를 그릇되게 해석해 가르쳤으며,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부패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도덕적으로 해이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특정 지역, 특정 종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1) 신도들에게 금지된 성경 읽기

 

유럽에서는 BC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불안정한 사회가 지속되면서

교육 시설과 교육 체제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중세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읽고 쓰는 것이 일부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 후반으로 갈수록 심화되어 책과 교육을 통해 지식을 얻는 일은

일부 계층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되자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먼저는 교리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이 명령하고

권고한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과거와 현재의 교리가 서로 모순되거나

이전에 발표된 교리가 성경과 다르다는 의심이 들 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성경의 해석을 두고 신학적 토론을 벌였고, 이를 조정하기 위해 몇 번의 회의가 열려

교리와 해석을 정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후기에는 그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 성경에 어떤 내용이 있다고 하면

다수의 평신도들은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석연치 않아도

성직자들이 말한 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전통으로 굳어져 평신도들은

이에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점차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로 인식되어 갔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기록 중 하나는

1199년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때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앙생활을 하던 프랑스의 카타리파와 왈도파의

성경 번역본이 평신도들에게 퍼져 그들이 자기 나라말로 성경을 읽는다는 보고가 있자,

교황은 즉시 비공인된 성경 번역판의 사용을 모두 금지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이슬람을 상대하던 십자군의 이름으로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물리적으로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1229년에는 교황 그레고리 9세가 평신도의 성경 소지뿐 아니라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했고,

단지 라틴어로 된 시편과 발췌본만 허용했습니다.

 

이후에도 교회에서는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강한 권력으로 이를 막았습니다.

1380년대에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신약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자,

교회는 사람들에게 이 성경을 읽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하며

번역된 성경책을 압수하고 불태워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옥, 성례, 교황 체제, 교황 무오설, 고해 성사, 성인과 마리아에 대한 해석 등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하는 이야기를 외면했습니다.

이것은 중세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에서 각 나라말로 번역된 개신교 성경을 금서 목록에서 해제한 것은

종교 개혁이 일어난 지 약 430년이 지난 1965년이었으며, 가톨릭의 의지로

영문판 성경 번역을 시도한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가 되어서였습니다.

 

2) 재정 충당을 위한 그릇된 노력들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대표적인 성당인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은

1503년에 건축을 시작해 120년 후에 완공되었습니다.

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최소 6조 원 정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 나라에서도 수도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 가톨릭 성당을 건축했는데,

성당이 왕궁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지기도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당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제들에게 대주교 자리를 판매했고,

면벌부 판매를 장려했습니다.

면벌부 문제는 중세에 누적된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지금까지도 개신교와 가톨릭은 성경의 해석이 상당히 다르고, 교리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다른 부분은 연옥에 대한 개념입니다.

가톨릭 교리에서는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은 연옥에 머무른다고 말합니다.

영혼들은 연옥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이승에서 지은 죄를 씻는데,

그 죄의 정도에 따라 연옥에 머무는 기간이 달라집니다.

가톨릭에서는 연옥에서 머무는 기간을 줄이는 권한, 즉 벌을 면하게 하는 권한인

면벌권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면벌부는 예수님과 성자들이 쌓아 놓은 공적을

교황이 세속의 재물과 교환해, 죽은 자들이 연옥에서 지내는 기간을 줄여 준다는

면벌권을 눈에 보이게 만든 약속 증서였습니다.

이러한 면벌권은 1095년 십자군 전쟁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면벌권을 약속했고,

이후에 성지 순례를 가는 이들에게도 면벌권을 약속했습니다.

성지 순례를 가서 일정 기간을 머무르면 연옥에서 지내는 기간의 10년,

혹은 20년이 감해지는 면벌권을 받는다고 믿었던 많은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가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꼽았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양피지에 인쇄된 면벌부(1455)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 세력에 패하면서

기독교 세력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신자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황 보나파시오는 한 세기가 바뀌는 1300년 한 해를 희년이라고 칭하고

특별한 해로 정해서 그해에 로마를 방문하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과 같은

면벌권을 부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유럽의 신자들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그들이 낸 헌금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에는 엄청난 재화가 쌓였습니다.

그 후 교황은 100년에 한 번으로 정했던 희년의 기간을

50년, 33년, 25년으로 줄여 나갔습니다.

현재까지도 로마 가톨릭의 희년 간격은 25년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유명한 도시의 성당에서는 사도들과 성자들의 유해를

수집하는 일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나 유명한 성자들의 유골이나 유품을 성당에 안치하면

많은 순례객들이 면벌권을 바라며 방문하거나 헌금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장소에 순례를 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면벌권으로는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교황은,

면벌권의 개념을 확대하여 면벌부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요한 테첼의 연설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교황이 독일의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독일인들이 로마에 올 수 없게 되자

교황 레오 10세는 요한 테첼을 독일로 보내 면벌부를 판매하도록 했습니다.

 

면벌부는 하나님의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선물이다.

오시라. 나는 여러분들이 범하려고 하는 죄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잘 인 쳐진 편지를 드리려고 한다.

나는 하늘에 있는 성 베드로의 사람들을 위한 나의 특권을 변경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면벌부로 사도가 설교를 통해 구원한 영혼보다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기 때문이다. 이 면벌부가 사하지 못할 큰 죄는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면벌부가 산 자의 죄뿐 아니라 죽은 자의 죄도 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들과 친구들이 지금 저 무저갱 바닥에서 애타게 울부짖고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왜 여러분의 돈이 돈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 그들의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도망해 나와 하늘을 향해 자유의 몸으로 날아가지 않겠는가?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더 이상 통치하지 않고 모든 권세를 교황에게 주셨다.

 

 

요한 테첼의 이런 연설을 들은 신도들은 면벌부를 사지 않는 것을 연옥에 있는

부모의 고통을 방치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이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면벌부를 구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엄청난 재화가 교회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3)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의 부패

 

교황은 교회의 지도자였지만, 로마를 포함한 넓은 지역에서는

교황령을 직접 다스리는 왕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과는 영토 분쟁으로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군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또 각 나라의 지식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추기경들과 고위 사제들은 각 나라의 정치에도 깊게 관여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왕들이나 귀족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성경을 기준으로 잘못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을 용서하거나 파문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가 중심이었던 중세 유럽 사회에서 파문은 매우 큰 벌이었습니다.

교회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것은 배척받고 생존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2세기 말 13세기 초 영국의 왕이었던 존은 로마 교황과 대립하다가 나라 전체가 파문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 백성들은 결혼을 해도, 아기가 태어나도, 부모가 세상을 떠나도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와 가족들이 축복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이 왕과 귀족들이 로마 교황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제들을 통해서

듣게 된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왕을 몰아내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결국 왕은 교황에게 항복했고,

교황에게 영국 전체를 바친다는 편지에 서명해서 보내는 아주 굴욕적인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영국 왕 존(왼쪽)과 그와 대립했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오른쪽)

 

 

지금의 독일 지역에 위치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도 파문되어

교황 앞에 굴복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황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교황 대신 다른 주교를 교황으로 임명해

두 명의 교황이 존재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중세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정치권력과의 이해관계를 따르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4) 도덕적 해이

 

중세의 교황들과 사제들은 성경의 교리뿐 아니라

본인들이 만들어 지켜 오던 규정도 어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독신의 의무를 어기고 아내를 두거나 자식들을 낳았고,

권력을 사용해 가족들을 어느 도시의 지배자로 세우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전해야 하는 사제들이 성찬식에 사용해야 하는 포도주에 취해 지내며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일은

중세의 글들 속에서 빈번하게 풍자되는 소재였습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실정을 알고 있는 지식층과 권력층은

결국 교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자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 이슬람 세력의 팽창

당시 교회에는 내부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럽을 둘러싸고 있는 이슬람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유럽을 압박해 왔던 것입니다.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반도에서 발생하여 아프리카를 통해 서쪽으로,

점점 유럽을 감싸는 형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를 믿는데, 알라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여호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같은 신을 섬기기에

이슬람교도들은 아브라함도, 모세의 율법도 인정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을 통해서 이어졌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라고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너무 듣지 않으니

새로운 선지자 무함마드가 세상에 와서 알라의 모든 뜻을 다 이루었으며

훗날 무함마드가 예수님과 함께 재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622년에 무함마드에 의해 주장되었고,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형성되기 전에 유럽은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무역했습니다.

무역이 이루어지는 길을 통해 상권이 발달했고, 도시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기존의 무역로가 막히게 되었고, 무역상들은 아라비아반도를 새로운 무역로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카와 메디나가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들이 무역의 이익을 독차지하다 보니 이곳에서는 빈부 격차가 발생했고,

무역로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부족들 간의 싸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실크 로드

 

그런데 622년에 메카의 상인이었던 무함마드가 알라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는 사회에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메카의 귀족들이 그를 탄압하자 무함마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겨

이슬람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 메카를 정복한 후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했고,

100년이 지났을 때는 그 세력 범위가 북부 아프리카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의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이슬람 법으로 통치하는 국가에서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을 딤미라고 하는데,

딤미에 대해 매우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이들이 세금만 내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고,

피지배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상관없이 세금만 내면

자유롭게 살 수 있었고, 원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622년에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교는

640년대에 아리비아반도 전체에 영향을 미칠 만큼 세력이 커졌다.

700년경에는 북아프리카 서쪽으로 진출했고,

732년에는이베리아반도를 지나 프랑스 영토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 후 세월이 지나 이슬람 세력도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을 칼리프라고 불렀는데,

내분으로 인해 칼리프가 암살당하자 661년에 우마이야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칼리프 자리를 세습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러한 칼리프의 정통성을 두고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쿠스(성경의 다메섹)를 수도로 삼고 정복 활동을 벌여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유럽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서고트족이 세운

서고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권을 놓고 서고트 왕국이 내분에 휩싸이자

이슬람 세력은 711년에 아프리카 대륙과 이베리아반도가 만나는 지점인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고, 그 후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장악한 이들은 프랑스를 통해 유럽까지 진입했습니다.

이들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때는 732년입니다.

그 후 프랑크 왕국이 전쟁을 통해 이슬람 제국을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몰아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프랑크 왕국은 유럽의 큰 지지를 얻었고,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칭호를 얻게 되는 기초를 닦게 되었습니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는 1031년에 이란 지방에서 성장한 아바스 왕조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11세기경에는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셀주크 튀르크가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술탄’의 칭호를 얻어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영토를 넓혀 나갔고, 이로 인해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비잔티움 제국의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서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때 이들은 헬라의 철학과 예술, 그리고 헬라어 성경을 가져갔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만 보다가 헬라어 성경을 접하고

성경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서 가톨릭의 주장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이 성경을 보는 눈이 생기다 보니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성경을 자기 말로 번역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성경 원문 자체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구분하는 힘이 생기면서 종교 개혁까지 이어지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셀주크 튀르크 세력은 136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출했고, 1390년에 이르러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우회해 유럽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1453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었고,

이들에 의해 결국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이때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유물과 문화들을 유럽으로 가지고 갔고

, 이는 베네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 문화가 아시아나 다른 곳으로 퍼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 역할을 했고,

이는 유럽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들과 종교도 다르고 무역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겪다 보니 유럽 전역에는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졌고,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세력과 싸웠습니다. 또 이들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의 레콩키스타

레콩키스타란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한 과정을 말합니다. 이는 어느 한 전쟁을 통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7백 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었고, 1492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레콩키스타는 722년도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코바동가 전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승리했는데, 이는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반도 침략을 시작한 이후 기독교인들이 거둔 첫 승리였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이슬람 세력 안에서는 내분이 이어졌고,

이러한 내분은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를 촉진시켰습니다.

 

 

750년의 이베리아반도 북쪽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 이남의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이슬람화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의 북서부 지방을 차지했습니다.

이 지역은 후에 레온 왕국과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발전합니다.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등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남쪽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콤포스텔라라는 곳에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명분으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승인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야고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장소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대성당은 9세기부터 현재까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길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성지 순례길의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왕국도 교황의 승인을 얻어

이베리아반도 북부에 가톨릭 국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031년에는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이후 소규모 왕국들로 나뉘어졌는데,

이 왕국들은 기독교 세력에 각개 격파되기 시작했습니다.

1085년에는 이베리아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톨레도가 함락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1037년의 이베리아반도

 

톨레도의 함락은 레콩키스타라는 하나의 국가적, 역사적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애초에 레콩키스타는 이교도들을 향한 정복 전쟁이었으나,

이때부터 기독교 세계에서 레콩키스타는 종교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교황과 수도회 같은 종교 조직이 이슬람의 축출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무장한 기사들이 이교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면벌부가 발급되기도 했습니다.

1162년의 이베리아반도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이슬람 세력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며 십자군을 소집해서

예루살렘을 침공했는데,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과 치르는 전쟁에 참전하는 사람들에게도

예루살렘 침공에 참여한 십자군과 동등한 축복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십자군 전쟁 기간에도

많은 기사단과 무장 조직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1037년과 1162년도의 이베리아반도 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슬람 세력의 영토는 더 줄어들었고

북쪽의 기독교 세력이 확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은 점점 영토를 잃어 갔고, 결국 1492년도에는 반도의 가장 남쪽,

그라나다 지방에만 이슬람 세력이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적으로는 기타 연주곡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이 있습니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그라나다 지방을 지배하고 있을 때 무슬림들이 건축한 궁전과 성곽의 복합 단지입니다.

 

레콩키스타로 인한 이베리아반도의 연도별 영토 재정복

 

1469년에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후계자인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후계자인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아라곤-카스티야 공동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이 왕국은

후에 국가 이름을 에스파냐(스페인)라고 바꾸었고,

1492년에는 그라나다까지 정복하면서 레콩키스타, 곧 국토 재정복 운동이 종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약 780년간 지속되었던 이슬람 세력의 통치가 종식되었습니다.

 

알람브라 궁전

 

이베리아반도의 레콩키스타는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레콩키스타가 종결된 14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이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스페인은 새로운 무역 항로를 개척하려 했고,

페르디난도 2세와 이사벨 국왕의 지원으로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고 항해를 떠났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517년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복음이 퍼져 나가다가 몇백 년 후에는 복음 운동의 축이 미국으로 옮겨지는데,

바로 이베리아반도에서의 레콩키스타가 이러한 일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또 약 780년 동안 이어진 장기간의 국토 재정복 운동은 이곳 사람들에게

이교도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했습니다. 가톨릭 외에 다른 종교를 허락하면

또다시 영토를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공개적으로 강하게 핍박했고,

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일이 당연시되었습니다.

1391년에 이곳에서 이미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당시 유대인의 절반 이상이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고,

또 많은 유대인들이 핍박과 학살을 피해서 이베리아반도를 떠나야 했습니다.

 

레콩키스타가 종결된 해인 1492년 3월 31일에,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국왕에 의해서

알람브라 칙령이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이어진 핍박으로 인해서 당시 약 30만 명의 유대인들 중

20만 명이 스페인에 계속 살기 위해 개종을 했고 나머지는 추방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1477년에는 카스티야 왕국에 독자적인 종교 재판소가 세워질 수 있도록 교황이 허가했습니다.

거짓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교인과 이슬람교인들을 찾아내어 심문하고 재판하는 것이

이 종교 재판소의 역할이었습니다.

거짓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색출하는 방법으로는,

스페인 전통 방식으로 만든 돼지고기 햄 하몬이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 중에 거짓으로

개종한 이들을 식별하기 위해서 이 햄을 먹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하몬을 많이 먹었고,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일은

이들이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성경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17년에 일어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로 성경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성경을 토대로 성경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영국의 틴들 영어 성경이나 스페인의 레이나 스페인어 성경이 그 예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하는 언어로 성경을 보게 되었고,

때맞춰 활자 인쇄 기술이 발명되면서 대량 인쇄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의 레콩키스타,

곧 국토 재정복 운동은 훗날 복음이 전해지는 일의 밑받침이 된 것입니다.

창가에도 하몬을 많이 걸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일은 이들이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성경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17년에 일어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로 성경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성경을 토대로 성경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영국의 틴들 영어 성경이나 스페인의 레이나 스페인어 성경이 그 예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하는 언어로 성경을 보게 되었고, 때맞춰 활자 인쇄 기술이 발명되면서 대량 인쇄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의 레콩키스타, 곧 국토 재정복 운동은 훗날 복음이 전해지는 일의 밑받침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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