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지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계몽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점차 성경을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경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사상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도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1815년부터 1913년까지 큰 전쟁이 없었던 시대에
지구 육지 면적의 4분의 1 정도를 식민지로 두었던 영국의 선교사들은
이동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국외로 나갈 수 있었고,
나라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덕에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세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교회 역사의 흐름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전쟁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던 영국은 힘을 잃었고,
영국 중심의 선교 활동도 약화되었습니다.
대신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한편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한 나라를 이루어 독립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크게 부흥할 때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진행되고 있을 때
30년 전쟁이 있었습니다.
30년 전쟁이 끝난 후에는 경건주의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조지 휫필드와 조너선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1차 대각성 운동이 진행될 때 미국 독립 전쟁이 있었고,
2차 대각성 운동 때는 남북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D. L. 무디가 중심이 되었던
3차 대각성 운동 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의 기독교 복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빌리 그레이엄을 중심으로
4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와 결과
19세기 후반에 제국들은 식민지 쟁탈전을 치르며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연합하거나 대립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고,
이에 맞서 영국은 프랑스 및 러시아와 손을 잡고 삼국 협상을 맺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의 카이로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까지,
그리고 카이로부터 인도 콜카타까지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1871년에 통일을 이룬 독일이 산업 혁명을 통해 50년 정도의 짧은 기간 만에,
먼저 산업 혁명을 이루었던 영국과 비등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부터 당시에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던
현재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그리고 이라크의 바그다드까지 철도 노선을 건설하고
그 지역들을 전부 식민지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독일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독립하며 대립과 충돌이 심해졌습니다.
발칸반도에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를 점령하면서
서로 다른 민족들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채 섞여 살게 되었고,
이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자 이 지역에 섞여 살던 각 민족은
독립 운동을 벌였는데, 여기에 유럽 열강이 끼어들었습니다. 세르비아 등
슬라브계 민족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고,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며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슬라브족 국가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 방문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계 청년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에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하고,
게르만족 국가인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면서
전쟁이 확대되었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맺은
삼국 동맹을 떠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국 편에 섰고,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가 동맹국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가 참전하면서
전쟁은 세계 대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시작된 지 약 3개월 후인 11월 1일에 참전했는데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과 대립하면서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지하드’를 부르짖었는데, 아랍어로 고투,
혹은 분투를 의미하는 이 말은 알라를 위해서 거룩한 전쟁에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던 이슬람 국가들과
인도에 있는 이슬람 세력이 참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915년 10월에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주 이집트 영사인 맥마흔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협정을 맺었습니다.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 국가들의 독립을 약속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랍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함께 지하드에 나서지 않고
오히려 영국 편에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전쟁이 길어지자 영국은 전쟁 자금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1917년 11월에 영국 외무부 장관이었던 밸푸어가
영국 내 유대인 사회의 대표격이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에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인 고향(a jewish national home)이 건설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대인 사회의 대표격인 로스차 일드 경에게 보낸 한 페이지짜리 서신으로,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국제 동맹 위임 통치령으로 지정한 뒤,
1930년대 들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뒤늦게 유대인들의 이주를 제한하려 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밸푸어 선언이 나오기까지 뒤에서 큰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차임 바이츠만이라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화학 교수입니다.
당시 영국은 화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초석 (질산 칼륨)이라는 물질을
칠레에서 수입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해상 봉쇄로 수입이 어려워지자,
영국 정부는 바이츠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초석 없이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기물을 아세톤으로 녹여야 했는데,
당시에는 쿠바에서 설탕을 제조하고 남은 부산물로 아세톤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세톤의 원료 역시 얻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때 녹말을 발효시켜 아세톤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바이츠만은
그 기술을 영국 정부에 제공하는 대가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본과 바이츠만이 제공한 아세톤 합성 기술로
영국은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미국이 연합국을 지원함으로써 연합국은 전쟁에서 더욱 유리해졌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차례로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고,
독일 내에서도 11월 혁명이 일어나 새로 수립된 정부가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전쟁은 1918년에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영국은 밸푸어 선언 한 달 뒤에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후에는 팔레스타인 땅을 완전히 점령하고
1948년까지 위임 통치를 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고,
그 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영국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영국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복음이 부흥했던 미국이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 이후 일어난 산업 혁명으로 경제가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1850년부터 1900년 사이에 D. L. 무디를 중심으로
3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깨달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선교사가 되어 전 세계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의 숫자는
영국에서 보냈던 선교사들의 숫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선교 운동으로 D. L. 무디의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이 전 세계로 선교하러 나갔던
미국의 ‘학생 자원 선교 운동’이 있습니다.
이 학생 선교사들 중에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기독교 선교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고,
미국 중심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라 없이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초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눅21:29~31)
예수께서는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 21:24)
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AD 70년경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전 세계로 흩어진 후
약 2천 년 만에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자체가 교회의 역사는 아니지만,
전쟁은 복음의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이어지도록 했고,
하나님께서 하신 예언의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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