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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종교 개혁과 그 영향 1

by 우연!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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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종교 개혁

종교 개혁을 의미하는 단어 ‘Reformation’은 새롭게 만들다,

변화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reformare’에서 유래한 말로,

중세의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대주교와 주교, 그리고 그 아래 많은 사제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 체제를 갖춘 거대한 기관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권위적이고 세속화된 거대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독일의 종교 개혁은 1517년부터 약 40년 동안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중부 지방에 위치한

아이슬레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1505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512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종교 개혁에 나섰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정문에

게시할 때만 해도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해 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면벌부가 성경과 맞지 않다는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기를 원했는데,

그의 글이 독일 및 전 유럽에서 큰 호응을 받게 되면서 논란이 급격하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였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통일된 중앙집권적 군주국이 아니라

2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공국들이 모여 하나의 연맹 체제를 이룬 국가였습니다.

수많은 영주들이 영토를 다스렸고,

일곱 명으로 구성된 선제후들의 결정에 따라 황제를 선출했습니다.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권이 있었던 선제후들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많은 영주들이 그를 지지했는데,

작센 지방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특별히 보호하고 끝까지 지지해 주었습니다.

카를 5세(1500~1558)

 

프리드리히 3세(1463~1525)

 

1517년 이후 루터는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1521년에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카를 5세로부터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칙령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한 루터는

그곳에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이듬해인 1522년에 출간했습니다.

그 후 독일 슈파이어에서 두 번의 제국 의회가 열렸는데,

1526년에 있었던 첫 번째 제국 의회에서 보름스 칙령의 적용이 유보되었습니다.

당시 카를 5세는 프랑스와 교전 중이었던 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위협까지 받고 있었기에 국내의 분란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루터의 추방을 유보하고 다음 종교 회의가 열릴 때까지

각 제후들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그러나 그 후 국제 정세가 안정되자

1529년 두 번째 슈파이어 제국 의회 때는 앞서의 선언을 철회하고

보름스 칙령의 엄수를 명령했습니다.

이때 종교 개혁에 뜻을 함께하는 개신교회 제후들이 항의서를 제출했는데,

그때부터 개신교를 항의자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개신교 제후들은 1531년에 황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독일 중부의 도시 슈말칼덴에 모여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루터는

첫 번째 슈파이어 제국 의회 이후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 교회가 훗날 독일의 루터 교회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예식들 중에

성경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미사 대신 설교를 하고, 함께 찬양했습니다.

성찬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아 세례는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루터로 인해 복음이 정확하게 전해지고

종교 개혁이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해서 교회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아 세례를 주는 방식으로

교회의 규모를 키워 가는 가톨릭교회의 성격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루터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

 

또한 루터교에서는 교인들의 구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강요하지 않았기에

교회 안에 확실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거듭난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기보다

영주들이 자신의 영토에 사는 사람들의 신앙을 결정했고,

이것을 국가의 법으로 정하고 정치적 힘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게다가 성직자들과 교사들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게 되어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루터는 정치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정치에서 종교를 분리해 내지 못했습니다.

연대순으로 보는 독일의 종교 개혁

 

루터는 1522년부터 동료 교수들과 함께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1534년에 신구약 성경을 출간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반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통일된 언어와 문화로 한데 묶이면서

최초로 독일인의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한 다음,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을 토벌하려 결의하면서

신교 세력과 구교 세력 사이에서 1546년부터 1547년까지

1차 슈말칼덴 전쟁이 있었고,

1552년에는 2차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는 공식 승인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성경(1534)

 

&.스위스의 종교 개혁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와 칼뱅을 통해 복음이 퍼져 나갔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이끈 사람입니다.

울리히 츠빙글리는 1484년 스위스 토겐부르크 지방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다가

1506년에 22살의 나이로 가톨릭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글라루스 지역을 담당하는 성직자로 부임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의 용병으로

전쟁에 나가게 되자 1512년과 1515년에 종군 사제로 함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스위스 사람들이 본국과 상관없이

각각 다른 나라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츠빙글리는 직업 용병과 교황 체제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

 

츠빙글리의 회심 과정에 대해서는

시기와 내용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습니다만,

그가 후에 신앙에 대해 발표한 67개 조항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원과 믿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516년에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설교 사제로 초청되어 갔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성례를 집행하는 대신 성경에 기초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에라스무스가 스위스 바젤에서 헬라어 성경을 발간했는데,

츠빙글리는 그 성경을 항상 곁에 두고 연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고, 그 수도원의 수도원장은

츠빙글리가 종교 개혁의 길을 걷는 동안 평생의 동반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1518년에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성당에 설교 사제로 초대되었고,

그 후 취리히는 초기 스위스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취리히는 인구 5천 명을 가진 스위스 북부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가톨릭의 형식적인 예배를 거부하고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강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강대상에 성경을 놓고 본문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설교했는데,

이는 당대에 매우 파격적인 설교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성경보다 전통을 더 중시하는 가톨릭의 방식에서 벗어나

성경을 철저하게 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모든 시민 앞에서 성경을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성경을 정확히 알면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결정하고 행동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성당

 

그 일환으로 그는 종교적 판단과 결정권을

시민들이 결성한 의회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년 동안 츠빙글리의 설교를 들으며 생각이 바뀌어 간 취리히의 시민 의회는

마침내 1523년에 설교 강단에서

성직자는 성경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강령을 결의했습니다.

이후 독일에서부터 불어온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가톨릭과 큰 충돌을 일으키면서

가톨릭에서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경 해석에 반대하라는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취리히 시민 의회는

“성경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라는 원칙하에

공개적으로 논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본인이 공식적인 자리에 오르는 대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1523년 1월 29일에 성인 숭배, 금식 관습, 마리아에게 예배하는 문제를 가지고

첫 번째 토론을 하면서 스위스 전역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때 취리히의 가톨릭 주교 콘스탄스도 초청했는데

그는 종교 개혁에 반대했던 가톨릭 신학자 존 파버를 대신 보냈습니다.

그렇게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 6백 명이 시민회관에 모였고,

토론은 참석한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토론 이후 취리히 의회는

성인 숭배와 마리아에게 예배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시민 의회에서 가톨릭 측과 가진 몇 번의 공개 토론에서

계속 승리했습니다.

그 결과 1523년 10월에는 교회 안에 성화와 성상을 배제하는 규례가 제정되었고,

이후 시민들에 의해 취리히 전역에서 성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수도원이 폐지되었고,

1525년 4월에는 시의회의 결정으로 가톨릭 미사도 폐지되었습니다.

이런 취리히의 변화에 주변 도시들도 영향을 받아

스위스 북부의 베른, 바젤 등지에서도

성상을 파괴하고 가톨릭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취리히 성상 파괴 운동을 묘사한 그림(1524)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을 주창했지만, 논란이 될 만한 점도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유아 세례를 고수했습니다.

세례가 죄를 사하는 직접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히 했지만,

성례를 사람들이 어떤 직책이나 직분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의식이나 서약으로 정의하고,

유아 세례도 그와 같은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유아 세례를 부정하며 복음을 깨달은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재침례파’와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츠빙글리는 일찍이 용병 제도를 반대했지만,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하나라고 생각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물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또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달라 루터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초기의 종교 개혁 세력이 가톨릭에 대항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가톨릭에서는 1215년부터 성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 안에 주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화체설’을 정식 교리로 채택해 왔습니다.

그리고 빵은 평신도에게 나누어 주지만 포도주는 사제들만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 모두 이 교리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비난했지만,

루터는 빵과 포도주 안에 신성이 머물 수 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한 반면에,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교리적인 대립은 두 종교 개혁 세력의 대립을 가져왔고,

종교 개혁에 동참한 이들은 이 대립이 종교 개혁의 흐름을 약화시킬까 염려했습니다.

결국 독일 남부 헤센의 개신교 제후 필리프가 1529년에 마르부르크에서 회담을 주선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루터와 멜란히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 등

당시 종교 개혁을 이끌던 이들이 참석해 3일 동안 토론을 했습니다.

이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에 대한 견해는 같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성만찬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정치와 종교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습니다.

루터는 정치 지도자가 종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일부 용인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영주가 가톨릭과 개신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이 그 영토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종교 지도자가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다.’라고 생각했고,

국가와 정부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종교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26개의 칸톤으로 이루어진 스위스 연합에도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1528년 6월, 취리히는 스위스 안에서 츠빙글리의 개혁에 동조해 개신교를 선택한

자치주 베른, 콘스탄스 등과 ‘기독교 시민 동맹’을 출범했습니다.

이후 다른 주들도 합류하면서 스위스는 기독교 시민 동맹에 합류한 개신교 연합과

나머지 가톨릭 연합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처음에는 개신교 측이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의 5개 주는 기회를 엿보다가

1531년 10월 11일에 스위스의 오랜 적인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취리히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8천 명의 군대는 급하게 모인 취리히의 2천 명의 군대를 격파했고,

전투에 참전했던 츠빙글리 역시 중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츠빙글리의 죽음으로 인해 취리히는 큰 충격을 받았고,

스위스 북부에서 강하게 일어나던 개신교의 개혁의 움직임은 기세가 크게 꺾였습니다.

그러나 취리히에서는 하인리히 블링어가,

스위스 서부의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진행했고, 그 움직임은 스위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2) 칼뱅의 종교 개혁

 

츠빙글리가 죽은 뒤 스위스 종교 개혁의 중심은

취리히에서 제네바로 옮겨 갔습니다.

제네바 종교 개혁의 중심인물은 바로 장 칼뱅입니다.

원래 프랑스 사람이었던 칼뱅은 가톨릭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칼뱅의 부친은 그가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칼뱅은 10대 중반에 프랑스 파리의 대학에 가서 공부하면서

성경을 읽는 데 필요한 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를 배웠습니다.

그 무렵 그는 종교 개혁 소식을 듣고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칼뱅은 이 변화를 가리켜 ‘예기치 못한 개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장 칼뱅(1509~1564)

 

"저는 괴로움에 빠져들어 몹시 불안했고,

영원한 죽음에 대해서 더욱 불안했습니다.

지나간 나의 삶을 책망하며, 저를 당신의 길로 가게 해 달라고

처음으로 신음과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련한 자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서운 말씀으로 저를 심판하여 황야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비는 것뿐이온데,

마침내 당신은 놀라운 선하심으로 저를 인도해 내셨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겪은 칼뱅은 학자가 되고자 했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파리에 ‘벽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파리의 개혁파 사람들,

즉 개신교인 몇몇이 교황과 가톨릭의 미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벽보를 파리 시내 곳곳에 붙인 것입니다.

벽보는 심지어 당시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었습니다.

그러자 국왕은 이것이 자기에 대한 공격이라고 인식하고

개신교도들을 본격적으로 억압하고 핍박했습니다.

이로 인해 칼뱅도 스위스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파리 ‘벽보 사건’ 당시의 벽보(1534)

 

칼뱅은 처음에 스위스의 바젤로 가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16세기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던 책 중 한 권인 『기독교강요』입니다.

책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서술한 책으로, 프랑스에서 고통받고 있는

개신교도들을 변호하고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강요』 초판의 서문에는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강요』(1559)

 

이 책이 출판되어 널리 읽히게 되면서 칼뱅 또한 유럽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후 칼뱅은 기욤 파렐이라는 종교 개혁가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제네바에 머물면서

그와 함께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 후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몇 년간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제네바에서 끝까지 종교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당시는 정치와 교회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츠빙글리는 국가와 교회를 동일시했습니다.

즉 이상적인 기독교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칼뱅은

이 이상적인 기독교 사회의 구성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들고,

그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강제하는 법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칼뱅은 국가와 교회를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교회가 어떤 정치 세력에 속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정치 세력이 잘못 나아갈 때

교회가 그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교황이든 군주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칼뱅의 생각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입헌 군주제나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되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칼뱅의 교리관은 그가 저술한 『기독교강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강요』에는 크게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는데,

하나는 성경의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직자나 교황의 말이 아닌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종교 개혁가들의 생각과도 일치했습니다.

칼뱅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마다 성경의 해석에 차이가 생길 때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츠빙글리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츠빙글리는 성경 해석의 권한이 시의회에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칼뱅은 개인이 읽고 개인이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이유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를 주관해 나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칼뱅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개인의 생각과 행동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흘러간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했습니다.

개인이 구원받는 일도 하나님이 미리 다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후에 장로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뱅이 주도했던 제네바에서의 개혁 운동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루터파 교회는 영주가 루터파 교회를 선택해야 영지 내 사람들이

루터파 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칼뱅이 주도했던 개혁파 운동은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국경이나 민족을 뛰어넘어 유럽의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그가 썼던 『기독교강요』였습니다.

 

『기독교강요』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칼뱅을 신뢰하게 되었고,

영향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제네바에 와서 목회자 훈련을 받고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전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 운동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고, 1560년대 초반 프랑스에는

1,700개가 넘는 칼뱅 개혁파의 회중 모임이 형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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