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교파의 발전
종교 개혁 이후 형성된 개신교 교파로는 마르틴 루터로 인해 생긴 루터 교회,
장 칼뱅으로 인해 생긴 개혁 교회와 장로 교회,
그리고 헨리 8세로 인해 생긴 영국 국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개혁주의자들을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유럽 대륙은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가톨릭 국가와 개신교 국가로 나뉘었습니다.
가톨릭은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개신교는 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반도, 네덜란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었습니다.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했습니다.
루터가 유럽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니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에서
그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중심으로 루터파가 생겨났습니다.
이때 유럽 전역에서 많은 학생들이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몰려왔는데,
그중 덴마크에서 온 한스 타우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에게 성경을 배운 후 덴마크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고,
1530년에 덴마크는 개신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덴마크의 지배 아래에 있던 노르웨이도
1537년에 개신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스웨덴에서는 페트리 형제들이 비텐베르크로 와서
루터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가 복음을 전파했고,
1529년에 개신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칼뱅의 교리는 처음에 스위스를 중심으로 전파되었고,
후에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칼뱅파 교인을 위그노라고 했는데 이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칼뱅의 교리는 네덜란드로도 전파되었으나 네덜란드도 가톨릭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의 제자였던 존 녹스가 교리를 전해 장로교가 생겨났습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를 통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발표하고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면서
영국 국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영국 국교회는 성공회라고 불리는데 개신교 교파들 가운데
가톨릭 성격이 가장 강한 교파입니다.
당시 영국 국교회 안에는 개혁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청교도 안에는 분리파와 비분리파가 있었고,
분리파는 영국 국교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갔고,
이후 그중 일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 가톨릭교회의 변화
1530년부터 이어진 종교 개혁의 바람은 오랫동안 ‘교회’라고 불리던 공동체를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나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개신교 세력이 가톨릭에 비해 약했지만,
독일과 북부 유럽,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그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개신교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전쟁과 정치를 이용했습니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미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접한 신자들의 이탈을 막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톨릭 내부에서도 심하게 부패한 문제는 제거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가톨릭의 움직임과 자정 작용을 반종교 개혁이라고 합니다.
반종교 개혁의 대표적인 합의로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교리 관련 회의가
종교 개혁 이후 처음으로 1545년에 열렸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는 가톨릭교회나 교황의 주도로 열린 것이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으로 열린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종교로 인해 일어난 혼란을 정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이 겹치는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엔트에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는 1545년, 1551년, 1562년에 세 번에 걸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때 결의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라틴어판 불가타 성경이 가장 큰 권위를 가진다.
• 전통이 성경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다.
• 기존의 일곱 가지 성례를 확정하며, 이를 어기거나 부정하는 자는 파문한다.
• 평신도에게 2중 성찬, 즉 빵과 포도주가 모두 필요하지는 않다.
• 연옥은 성경과 교부들의 오랜 전통에 근거하여 존재하며,
그곳에 있는 영혼들은 신자들의 기도와 특별히 거룩한 미사,
성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칭의는 은혜와 신자 사이의 협력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행에 기초한다.
위 내용은 가톨릭교회가 종교 개혁 세력이 표방했던
“오직 성경”을 거부했음을 의미합니다.
연옥에 대한 개념은 그대로 인정되었고,
가톨릭교회 내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교리를 유지하고
정리하는 정도로 회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리되지 않았던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규율, 형식이 확립되었고,
가톨릭 세력권에서는 교황의 권한이 오히려 강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 개혁의 위협적인 힘을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락한 고위 성직자를 처벌하고 예수회라는 조직을 통해
성직자의 교육을 강화해서 부패 정도를 전체적으로 낮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었던 면벌부 판매의 남발도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교회 내부의 부패를 정리하는 데는 예수회의 역할이 컸습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스페인 사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창립된 단체로,
성직자들의 영성 교육과 고행, 청빈을 강조하여
가톨릭교회 내부의 부패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성경에 대한 논쟁이 매우 활발했기에
고등 교육을 통해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높여 논쟁이 일어나면 방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회는 1556년에 로욜라가 사망할 때까지
16년 동안 온 유럽에 총 74개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이 대학들은 로마에 본부를 두고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교육 형태는 이미 개신교 세력이 우세한 독일이나 동유럽 지역에서
가톨릭교회가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반가톨릭 정서가 강했던 영국에서도
예수회가 여러 귀족 가문의 교육을 담당했고,
폴란드와 프랑스의 예수회는 국왕들의 가정 교사를 담당하며
개신교 탄압을 부추겼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는 예수회 사제가
개신교를 탄압하는 칙령의 초안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사제가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을 가지고 봉사와 기도,
고행을 행하며 노력한다는 인상을 심어 갔습니다.
수도원에서 고행하는 수도사의 모습은 중세 수도사의 모습이라기보다
예수회의 모습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도 예수회 출신입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미 반가톨릭 정서가 강해져 버린 유럽에서
눈을 돌려 신대륙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교세를 넓혀 나갔습니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도 식민지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라틴 아메리카 정복 초기 역사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멕시코에서는 1521년 스페인의 코르테스에 의해 아즈테카 왕국이 멸망하고
식민지화 되면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출했습니다.
또 멕시코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로 갔고,
그로 인해 가톨릭이 더욱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브라질은 1500년에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곳에 진출해서 ‘레둑시온’이라고 불리는
원주민 촌락을 설립했습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예수회와 함께 공동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는 원주민들의 무분별한 노예화를 부분적으로 막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또 상파울루와 리오데자네이루 같은 몇몇 마을들을 세우고
그곳에서 포교 활동을 하며 주민들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아시아에서도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1541년에는 인도, 1580년에는 일본의 나가사키, 1661년에는 티벳의 라싸,
1687년에는 중국 베이징에 진출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있습니다.
그가 저술한 교리서인 《천주실의》는 한국에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가톨릭이 전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트리엔트 공의회와 예수회의 활동으로 현재의 가톨릭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미사 절차와 용어가 양식화되었고,
일률적인 교육을 통해 사제들의 서품 제도와 교황 체제가 정비되었으며,
교황의 중앙집권화가 강화되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으로 인해
가톨릭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진 문제점으로 인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나 문제점을 고쳐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 간 것이 아니라
개신교는 분리되어 별도의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반종교 개혁을 통해 문제점을 일부 개선했으나
기존의 교리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정치와 국가 간의 이해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유럽 사회가 흔들리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30년 전쟁의 발발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개신교는 교세를 확장하고자 했고,
가톨릭은 예수회를 중심으로 반종교 개혁을 진행하며 개신교를 억압하고
자기 세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양측 모두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아 갈등이 점점 커졌고,
이는 정치적인 갈등으로 번져 국가 간의 전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의 개신교인들은 수십 년간의 위그노 전쟁으로 인해 많은 수가 죽었고,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한 이후에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어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세기를 지나 17세기에 이르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 갈등이 크게 폭발한 것이 1618년에 시작되어
1648년까지 30년 동안 이어진 30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크게 네 차례의 전쟁으로 구분하는데,
어떤 나라가 참전했느냐에 따라 각각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1) 1차: 보헤미아–팔츠 전쟁(1618~1620)
보헤미아는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 속한 지방입니다.
보헤미아에는 얀 후스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매우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페르디난트 2세가
1617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되어 개신교도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자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그럼에도 페르디난트 2세는 계속 가톨릭 신앙을 강제했고,
분노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왕의 신하들을 프라하의 한 성에서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프라하 투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 대신
독일 팔츠 지역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때마침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고,
가톨릭 연합군을 모아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새로 왕이 된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와 보헤미아뿐만 아니라
주변 개신교 영주들과 함께 동맹을 맺어 가톨릭 연합군에 대응했습니다.
전쟁은 가톨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보헤미아를 점령한 페르디난트 2세는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보헤미아가 가톨릭 국가가 되자 주변 개신교 국가들은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매우 강한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 2차: 덴마크 전쟁(1625~1629)
이때 프랑스는 이 일을 경계했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 중심의 국가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잉글랜드,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과 같은 개신교 국가들과 손을 잡고
신성 로마 제국을 경계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덴마크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 4세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한 것입니다.
덴마크 왕은 주변의 개신교 국가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독일 북부 지역에서
덴마크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는 숨은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로써 종교적인 이유로 시작되었던 전쟁은
점점 더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승리로 끝났고
전쟁에서 패배한 덴마크 왕은 덴마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3) 3차: 스웨덴 전쟁(1630~1635)
3차 전쟁은 사자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일으켰습니다.
프랑스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스웨덴 왕을 지원해 주었고,
스웨덴은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영주들과 동맹을 맺어 황제군을 공격했습니다.
스웨덴 왕은 황제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으나, 전쟁 중에 전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스웨덴군과 개신교 영주들의 동맹이 느슨해졌고, 황제군은 그 틈을 타서
스웨덴군을 제압한 후 개신교 영주들과 휴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로써 3차 전쟁이 끝났습니다.
4) 4차: 프랑스-스페인 전쟁(1635~1648)
이때까지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뒤에서 지원만 하고 있었으나 4차 전쟁 때는 직접 참전해서 싸웠습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신성 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보호하고 있던 한 주교가 스페인에서 사로잡혔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프랑스는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직접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은 종교 전쟁의 틀을 벗어나
황제파와 반황제파의 영토 전쟁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상당한 군사 강국이었습니다.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큰 재산으로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적함대라고 불리는 강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고 육군도 매우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고,
결국 이때부터 서유럽의 주도적 입지를 상실하고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스웨덴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군을 물리치고 승전을 거두었습니다.
처음 전쟁이 일어났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까지 스웨덴군이 점령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황제군은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쟁이 30년간 이어지다 보니 영주들도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이로써 두 진영은 1648년에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했습니다.
5) 베스트팔렌 조약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와 관련해서는 1555년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결정 내용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는
영주가 자신이 소유한 영토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1555년 당시에는 영주가 결정할 수 있는 종교가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교회 두 가지였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칼뱅의 개혁 신앙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또 개인의 신앙도 존중해 주었습니다.
만약 영주의 영토 안에 영주와 신앙이 다른 사람이 거주하더라도
그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조약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영주들의 연합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에서
영주들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0년이나 이어진 전쟁은 유럽 사회,
특히 독일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 학살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고,
전쟁터가 되었던 독일의 많은 도시들이 황폐화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어서 독일은
나라 자체가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공국들로 나뉘게 되었고,
그런 상황은 1800년대 중반이 지나서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했습니다.
또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이 정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유럽의 가톨릭 종주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근대 유럽의 주권 국가 체제가 확립되는 바탕이 마련되었습니다.
&.신앙 부흥 운동(경건주의)
끔찍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가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광기를 띤 폭력성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가 국가의 정책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나의 신앙을 비롯해 다른 사람의 신앙도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용론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고와 이성을 가지고 전쟁을 피하자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생각들은 훗날 계몽주의 사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의 중요성이 크게 약화되자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루터파 교회와 칼뱅의 개혁파 사이에
교리를 가지고 다투는 일들이 빈번했는데, 더 이상 교리로 싸울 것이 아니라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친첸도르프 백작과
그와 함께했던 모라비아 형제단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세계에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게 되었고,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후에는 미국에서도 신앙 부흥 운동인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으로 교회사 속에는 복음과 상관없어 보이는 역사가 흘러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도 면밀하게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오랜 시간 전쟁을 하며 많은 피를 흘렸는데,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이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을 때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독립 선언문에도 ‘종교의 자유’라는 문구가 들어갔는데,
이렇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분위기는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
복음이 크게 전해지는 사회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교회사의 한쪽에서는 순수한 복음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복음의 명맥이 유지되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형식과 법을 바꾸려는 투쟁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이 역사를 주관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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