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도의 숫자가
개신교 신도의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가톨릭이 국교로 지정된 나라들도 있습니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는데,
이때 자신들이 믿던 가톨릭 신앙을 이곳에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라틴 아메리카에 전파된 것은 그보다 훨씬 늦은 1700년대의 일입니다.
당시 모라비아 선교단이 카리브해 서인도 제도의 섬에서
선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개신교인 숫자는 20세기에 들어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가톨릭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 대다수는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북쪽에 있는 나라는 북미 대륙에 위치한 멕시코이다.
멕시코 남쪽의 나라부터 중미에 속하는데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까지 일곱 나라와
카리브해 서인도 제도의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공화국 등이 있다.
남미 대륙에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그리고 브라질이 있다.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로는 벨리즈와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 중 일부,
브라질 북쪽의 작은 세 나라가 있다.
가이아나는 영어를, 수리남은 네덜란드어를, 프랑스령 기아나주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 외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자기 민족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토속 신앙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가톨릭 전파의 경제적 배경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는 1492년입니다.
그 당시 유럽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건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들 수 있습니다.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것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였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소아시아 전역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과 동양을 이어 주던 가장 중요한 무역로인
실크로드가 차단되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던 수입품 중
유럽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향신료, 특히 후추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후추를 검은 황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실크로드를 차단하고 높은 통행세를 요구함에 따라
유럽에서는 후추 값이 폭등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항해 경험이 많은 탐험가였습니다.
그는 1484년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를 찾아가서 대서양을 항해해
동양으로 가는 탐험을 지원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유럽 대륙의 동쪽이 아닌 대서양 쪽으로 돌아서
인도로 가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서쪽으로는 드넓은 바다와 접하고 있고, 육지로는 스페인과 국경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내륙으로 진출하기에 지리적 조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에 집중하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전쟁 중이었습니다.
스페인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과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 남쪽을 돌아 동양으로 가는 바다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무역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는 것은
현대에 우주를 탐험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배와 정확한 지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이탈리아에서 조선공, 항해 장비 기술자, 지도 제작자,
천문학자들을 불러 모아서 새로운 항해 기술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포르투갈의 이런 행보를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우회하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콜럼버스는 곧바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가겠다고 생각하고, 바다 항로 개척의 선두 주자인 포르투갈의
국왕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물과 음식의 추가 보급 없이 연속으로 항해할 수 있는 기간이
6주에서 9주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대륙을 발견하지 못해 다시 돌아올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항해할 수 있는 기간은 약 4주였습니다.
따라서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 중간에 물과 음식을 보급할 수 있고,
선박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신속히 육지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제안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후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1세를 찾아가서 대서양 탐험 지원을 요청했고,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여왕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 배경은 이렇습니다.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반도는 711년부터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212년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으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전쟁을 했습니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퇴출하려는 움직임을
레콩키스타, 즉 ‘국토 회복 운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있었는데,
1469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함으로써
통일 스페인 왕국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1492년에 이사벨 여왕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퇴출하고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모든 이교도들을 추방했는데,
이때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같이 추방당하면서
유대인들을 통한 자금줄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그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는데,
때마침 콜럼버스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와 탐험을 지원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지만
만약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만 한다면
막대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스페인이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또 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방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가톨릭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새로운 영토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었던 스페인의 성직자들이
이사벨 여왕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선박과 선원들을 지원해 주었고,
1492년 본격적으로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배 3척과 90명의 선원들을 데리고 대서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예상했던 2주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나
5주 만에 지금의 바하마 군도 중 한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섬의 이름을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라고 지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라고 생각했고
그곳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향신료와 황금은 없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했던 곳의 일대는 지금의 서인도 제도로,
‘서인도’라는 이름 자체가 콜럼버스가 상륙한 섬을 인도라고
오인했던 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다음 해인 1493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발견한 새로운 땅으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새로운 영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포르투갈 왕이 콜럼버스가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하게 항의했는데,
1479년에 교황의 허가 아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체결했던
알카소바스 조약 때문이었습니다.
1479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고, 이 싸움을 종결시키기 위해 양국은
알카소바스에서 만나 협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이사벨 1세를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에,
스페인은 아프리카 서북부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 남쪽으로 항해할 수 없으며,
이 지역에서 새로 발견되는 영토를 모두 포르투갈의 소유로
인정하겠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 제도는
카나리아 제도 남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알카소바스 조약을 위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교황은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493년에 서경 38도의 새로운 가상의 자오선을 그어
분계선 서쪽은 스페인의 영토,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토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 출신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나라는 이듬해인 1494년에 토르데시야스에서 만나 다시 협상하여
서쪽으로 더 옮긴 서경 46도 자오선 지점을 분계선으로 하여
영토를 새로 나누었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150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현재 라틴 아메리카 대륙 서쪽에 있는 나라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렇게 해서 중남미의 서쪽 지역은 스페인의 영토가,
동쪽 지역인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브라질 영토를 내륙으로 넓혀 나갔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후로 세 차례 더 서인도 제도로 항해했는데,
1506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습니다.
이후 1650년까지 약 150년의 기간을 ‘대항해 시대’, 혹은 ‘발견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새로운 대륙을 찾아서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했습니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쪽을 지나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에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 항로가 열렸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신대륙을 여러 번 탐험하고 나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1503년에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신대륙의 이름 ‘아메리카’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1492년에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퇴출시켰고,
이후 스페인에 있던 많은 군인 출신 탐험가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오랜 기간 이어졌던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으로 인해
이교도들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복이 곧 기독교화라고 생각했고,
가톨릭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정복자들과 함께
신대륙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무력을 행하며
강제로 개종시켜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가톨릭 전파의 종교적 배경
1) 종교 개혁과 가톨릭 세력의 축소
중세 시대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력은 교회와 결탁했고, 교회는 세속화되고 부패하여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자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체코의 얀 후스 같은 사람들은 로마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던 사건을 시발점으로
유럽 전역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개신교가 교세를 확장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내부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개신교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의 개혁이라는 의미에서
‘반종교 개혁’이라고 합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반종교 개혁 회의를 열었는데,
그 대표적인 회의가 1545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진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종교 개혁가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부정했습니다.
개신교에서 믿음으로 사람이 의로워짐을 설명했다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그것과 반대로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각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지만,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교황이나 주교가
성경의 핵심적인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개신교를 억압하기 위해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개신교 서적이나 개신교도들이 번역한 성경 번역본을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금서 목록에 올라간 책을 소지하기만 해도 사형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반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단체가 ‘예수회’입니다.
스페인 군인 출신의 수도사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는
교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군대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예수회는 설립 이후에 매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선교를 했는데,
유럽 내 개신교의 확장을 억제하고 가톨릭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2) 식민지 선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오랫동안 가톨릭 중심의 역사가 이어져 왔습니다.
캐나다나 미국에는 종교 개혁이 이루어진 나라의 개신교도들이 이주를 한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는 가톨릭 중심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오랫동안 점령하며
식민 통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16세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남으로써 유럽에 개신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가톨릭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가톨릭에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 눈을 유럽 밖의 세계, 곧 식민지로 돌렸습니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는 원주민들의 고유 문명이 존재했습니다.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 잉카 문명이 있었고,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치자들에게 식민지의 정치뿐 아니라
종교까지도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서,
식민지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를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입니다.
이처럼 라틴 아메리카에 가톨릭이 전파되었던 상황에는
강대국들의 정치적인 목적, 경제적인 목적,
가톨릭교회의 종교적인 세력 확장을 위한 목적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그곳으로 계속 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선교사들도 함께 보냈습니다.
1520년대 중반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선교 일을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서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건너갔습니다.
예수회 사람들도 그 뒤를 이어서 가톨릭을 전파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가는 수도사들이 점점 많아졌고,
1600년대 중반에는 3천 명 정도의 수도사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을 전파했던 방법을 살펴보면,
원주민들 개개인의 믿음보다는 단체 개종을 통한 교세의 양적 확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1524년부터 약 7년 동안 원주민 백만 명에게
세례를 주고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이때 수도사들은 원주민들의 토착 종교를 가톨릭식으로 바꾸어서
그들이 최대한 반발하지 않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섬기는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성인들이나
마리아의 상을 대신 섬기도록 하고, 원주민들의 토착 종교에 있는 성찬이나
세례와 비슷한 의식들을 대신해서 가톨릭의 성찬과 세례를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개인이 거듭나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원래 믿던 토착 종교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유카탄반도와 같은 지역에서는 반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들은 더욱 강제적으로 원주민들을 대했고,
심지어 고문하거나 화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에도 종교 재판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종교 재판소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억압하기 위해 로마 교회에서 세운 것으로, 고문이 허락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스페인에는 1478년에 종교 재판소가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국왕 페르난도와 여왕 이사벨이 종교 재판소를 세웠던 것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국왕은 이들을 스페인의 통일과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로 판단하여 억압하고자 했고,
효과적인 탄압을 위해 종교 재판소를 만든 것입니다.
종교 재판소에서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개종시켰고,
개종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인이 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570년경에는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두 곳에 종교 재판소를 세웠습니다.
먼저 페루의 리마에, 이듬해에는 멕시코시티에 종교 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개종시킨 사람들이
다시 원래의 토착 종교로 돌아가는지를 감시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기독교 전파는 개인의 믿음을 위하기보다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교세를 확장해 가고자 하는 목적이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떠올려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15-18)
외모로 전파한다는 것은 참이 아닌 거짓으로, 혹은 가식으로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그리스도가 전해질 때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가톨릭을 전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참된 복음을 듣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욕심이나 복잡한 계산들을 뛰어넘어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를 이끄셨고,
그 결과 현재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진리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귀하고 또한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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