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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라틴 아메리카 기독교 역사 Ⅱ(정복과 수탈의역사)

by 우연!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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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올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는 원주민들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력을 앞세운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매우 빠르게 정복되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명과 종교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는 부족과 국가 간의 전쟁이 잦았습니다.

농사를 짓고 자주 전쟁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로 식량이 부족해질 때나 전쟁으로 인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보게 될 때,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신이

그 어려움을 달래 주기를 바라며 신을 섬기고 예식을 행했습니다.

 

이들은 태양의 신, 달의 여신, 비의 신, 눈의 신과 같은 자연의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섬겼는데, 이 일을 관장하는 사제 계급은 신격화되었습니다.

계층의 가장 정점에 있는 왕이나 황제 역시 신격화된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아스테카, 마야, 잉카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1) 아스테카 문명

 

아스테카 제국은 현재의 멕시코 중남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스테카 문명이 시작된 곳은 지금의 멕시코시티가 있는 멕시코 계곡이었습니다.

아스테카 부족은 1218년경에 멕시코 계곡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먼저 이곳에 들어와 있던 부족 국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후에 함께 지배를 받던 다른 두 부족과 연합하여 지배 부족을 무너뜨리고

멕시코 계곡 지역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 후 아스테카 부족은 영토를 더 확장해 나갔고,

1344년부터는 지금의 멕시코시티 자리에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1519년에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아스테카 영토에 들어왔을 때

이들은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의 수많은 작은 도시로부터

공납을 받는 인구 2천 5백만 명의 대제국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아스테카인들은 거대한 신전들을 짓고 여러 신들을 섬겼는데,

신상을 만들어 신전에 모셔 놓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들의 제물 중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들도 있었습니다.

아스테카인들이 섬겼던 여러 신 중에 최고의 신은 ‘우이칠로포치틀리’라는

전쟁과 태양의 신이었습니다.

아스테카인들은 이 신이 자신들을 테노치티틀란까지 인도해 주었고,

주변 국가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신이 노여워하지 않게 하려고 신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 밖에도 아스테카의 대표적인 신으로는 비의 신 ‘틀랄록’이나

봄과 재생의 신 ‘시페 토텍’이 있었습니다.

이 신들의 신상도 만들어 비슷한 방식으로 숭배했습니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 있는 테노치티틀란의 모형도,

대신전에서는 신을 섬기고 숭배하는 예식이 진행되었다.

현재 멕시코시티에 남아 있는 테노치티틀란 유적. 신전의 계단으로 추정된다.

아스테카 문명의 신 우이칠로포치틀리. 아스테카인들은 돌이나 나무를 깎아서 만든 신상을 깃털이나 귀한 보석으로 치장했다. 축제일이 되면 큰 신상을 들고 대신전까지 행진했고, 신전에 도착하면 신상 앞에 제물을 바쳤다. 제물을 죽여서 신상의 입에 넣는 예식이 끝나면 음악과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2) 잉카 문명

15세기 중반에 페루의 고원 지대에서 작은 부족 국가로 시작한 잉카는

16세기에 그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은 북쪽으로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의 국경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칠레와 아르헨티나까지 굉장히 넓은 지역을 차지한 인구 9백만 명의 제국이었습니다.

잉카 제국의 가장 유명한 유적지로는 마추픽추가 있습니다.

잉카 문명의 최고의 신은 창조의 신 ‘비라코차’였습니다.

또 태양의 신 ‘인티’를 비롯해 달의 여신, 비의 신, 전쟁의 신, 감자의 신, 옥수수의 신 등을 섬겼는데

그 숫자가 60가지가 넘었다고 합니다.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마추픽추 유적. 해수면으로부터 2,430m 높이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잉카 문명의 창조의 신 비라코차

잉카 문명의 태양신 인티

잉카 제국의 신전이었던 파차카막 유적. 잉카인들은 병이 들거나 위험이 닥쳤을 때, 혹은 농사가 잘되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축제를 열고 신전의 신상 앞에 희생 제물을 바쳤다. 제물을 바치는 데는 신들의 분노를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3) 마야 문명

마야인들은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와 현재의 과테말라 전체, 엘살바도르, 벨리즈까지

중앙아메리카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과테말라 북쪽의 도시 페텐을 중심으로

최고의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수학, 천문학, 조각, 건축 같은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마야인들은 티칼 신전과 같은 신전에서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마야 문명의 최고의 신은 창조의 신 ‘이참나’이며,

이참나가 불과 비, 수확, 토지까지도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밖에 태양신, 달의 여신, 옥수수의 신, 죽음의 신도 있었습니다.

마야인들은 신전에 큰 신상들을 만들어 세워 놓았고, 제단에 제물을 바치며 그것을 섬겼습니다.

이들 역시 제물로 사람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마야 문명의 티칼 유적. 과테말라 페텐 인근에 위치한 이곳은 마야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커다란 광장이 있고, 광장 주변에 피라미드와 같은 신전들이 둘러서 있다.

 

마야 문명 창조의 신 이참나

무릎을 꿇고 새의 신을 숭배하는 마야인의 모습

 

&.라틴 아메리카 문명의 멸망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복자들에게는

본국의 경제적인 위기를 극복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종교 개혁으로 인해 약화된 가톨릭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이곳 원주민들의 모습을 매우 이단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그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슬람 세력과 수 세기 동안 전쟁을 했기 때문에

이교도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의 종교 행위를 뿌리 뽑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톨릭 신앙을 심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라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의 신상을 철거하고 신전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십자가나 마리아상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다른 부족의 신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섬겨 왔기 때문에

가톨릭 신앙을 순조롭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 의식을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정복자들은 이러한 원주민들의 행위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복자들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온 수도사들은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며

가톨릭 신자로 개종시켰습니다.

또 학교와 선교촌을 지어서 이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원주민들이 원래의 종교 의식을 계속하자

테노치티틀란(현재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과, 리마(현재 페루의 수도)에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고 이들을 크게 탄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토속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 아스테카와 마야의 멸망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에 아스테카 제국의 영토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원주민들이 토속적인 종교 의식을 이어 가는 것을 큰 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테노치티틀란까지 진격해 나가며

신전과 신상들을 철거했습니다. 코르테스 일행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을 때

당시 아스테카 제국의 황제였던 모크테수마 2세는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오랜 전설에 따라 그들을 신이 보낸 사신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크테수마 2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코르테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붙잡혔어도 제국은 항복하지 않았고 새로운 왕을 선출하여

코르테스의 군대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고,

오래전부터 아스테카의 지배를 받던 부족 국가들이 스페인 편에 서면서

결국 1521년에 아스테카의 마지막 왕 콰우테목이 항복하고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했습니다.

그 후 코르테스는 군대를 유카탄반도 남쪽으로 보내 마야 문명을 파괴해 나갔고,

마야 사람들도 30년간의 저항 끝에 결국 스페인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1485~1547)

모크테수마 2세(1466?~1520)

 

 

2) 잉카의 멸망

잉카 제국을 정복한 사람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입니다.

그는 1529년에 스페인 왕실의 허락을 얻어

페루를 정복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당시 잉카 제국의 왕은 아타우알파였는데,

그가 이복형제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고 수도로 진군하고 있을 때

피사로가 잉카 제국에 도착했습니다.

피사로는 매복하고 있다가 아타우알파 일행을 덮쳐서 죽이고,

왕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그 후 1533년 11월에 수도 쿠스코를 점령하고 약탈했습니다.

잉카인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30년이 넘는 저항 끝에 잉카 제국도 1569년에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1475?~1541)

아타우알파(1502?~1533)

 

 

3) 멸망의 원인

스페인 군사들은 원주민들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군대로 원주민들을 정복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첫 번째 이유로 수 세기 동안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하며

축적된 스페인 군대의 경험과 우월한 성능의 무기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대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쏘는 대포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는 전쟁에 사용하는 큰 짐승들이 없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데려온 말이 빠르게 달리는 것을 보면서

원주민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내부 분열입니다.

제국들은 피지배 부족들로부터 공납을 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니

피지배 부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페인 군대가 도착하자,

피지배 부족들은 오히려 스페인의 편에 섰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유럽 사람들로 인해 유입된 세균입니다.

1520년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하고 있을 때 그곳에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천연두에 걸린 스페인 군사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도시에 천연두가 창궐하게 된 것인데,

스페인 사람들은 천연두에 이미 면역을 갖고 있었으나

원주민들은 그렇지 않아 상당히 많은 수가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이로부터 수십 년 뒤인 1545년과 1576년 두 번에 걸쳐 살모넬라균에 의한

질병 코코리츨리가 만연해 약 1,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딘

1492년 이후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라틴 아메리카 지역 인구의 90%가 감소한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 정복되는 과정은 원주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의 착취와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질병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사회 조직과 생활 기반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후 그곳의 제국과 문명이 정복되는 과정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멕시코의 시기별 인구 감소표

 

&.라틴 아메리카가 유럽에 미친 영향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 고추, 카카오 같은

작물들을 재배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작물들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입니다.

정복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후

그곳의 많은 작물을 유럽으로 가져갔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작물들의 가치를 잘 몰랐지만

훗날 감자나 옥수수는 유럽의 중요한 식량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가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음식, 특히 후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하고 후추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고, 후추(페퍼, pepper) 대신에 맛이 매운 고추를 유럽으로 가져갔습니다.

고추의 영어 이름인 ‘칠리 페퍼(chili pepper)’, 혹은 ‘핫 페퍼(hot pepper)’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탕수수나 밀, 벼, 콩, 커피, 바나나 같은 작물들은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전파되었고,

소나 말, 돼지, 양과 같은 가축들도 함께 넘어갔습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의 최고 관심사는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였습니다.

유럽에서 설탕은 왕이나 귀족만 먹을 수 있는 매우 귀한 재료였습니다.

사탕수수는 따뜻하고 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데,

서인도 제도의 기후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적합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있는 아이티섬에 사탕수수 씨앗을 심었고,

콜럼버스 사후에 사탕수수 재배가 매우 잘되어 설탕을 유럽으로 가져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사탕수수는 넓은 땅에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작물이기 때문에 재배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6세기부터 유럽 사람들은 설탕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에 아시엔다라고 부르는

사탕수수 대농장을 만들고 원주민들을 데려다가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인해 원주민 수가 크게 감소하자 아프리카의 노예를 서인도 제도로 데려갔고,

노예들이 대량 생산한 설탕에 높은 값을 매겼습니다.

이러한 ‘대서양 삼각 무역’을 통해 유럽은 아주 큰 돈을 벌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대서양 삼각 무역

 

당시 노예 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무역선에 태워 라틴 아메리카로 데리고 갔는데,

배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보니 항해 도중에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6세기부터 약 3백 년 동안 1,100만 명의 노예들이 신대륙으로 갔는데,

항해 후 신대륙에 무사히 도착한 이는 그중 95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탕수수 대농장에 팔려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낮에는 뙤약볕 아래서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밤에는 설탕 정제 작업을 했는데,

노동 시간이 하루 18시간에 달했습니다.

자메이카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

 

사탕수수 대농장에는 노예들이 평균 백 명에서 5백 명까지 있었고,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농장의 주인은 유럽인들이었고 예수회 성직자들이 많았는데,

노예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루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노예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습니다.

노예들을 가톨릭 신자로 강제 개종시킨 것이었습니다.

 

서인도 제도의 설탕 농장을 묘사한 삽화(1596, 테오도르 드 브리)

 

&.라틴 아메리카의 개신교 역사

개신교가 라틴 아메리카에 전파된 것은

가톨릭이 전파된 때로부터 약 3백 년이 지난 18세기의 일입니다.

친첸도르프 백작이 1731년에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6세의 초대로 대관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서인도 제도의 아프리카 출신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 노예는 서인도 제도에 있는 동료들에게 아무도 복음을 전해 주지 않는다고 호소했고,

친첸도르프는 그를 모라비아 공동체로 데리고 가서 그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청년 두 명이 서인도 제도로 가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예수회 성직자들이었던 농장의 주인들은 개신교 선교사를 반기지 않았기에

이들은 덴마크령의 세인트토머스섬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이들은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각오를 하고 대서양을 건넜고,

이 일은 모라비아 형제단이 해외 선교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모라비아 선교단은 라틴 아메리카 곳곳을 다니며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친첸도르프 백작 또한 여러 선교지들을 직접 방문하며 돌아보았고,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1732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한 1760년까지

약 226명의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견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가톨릭이 전파된 배경에는

강대국들의 정치적, 경제적인 목적이 컸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원주민들에게나 노예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는 매우 어려웠고,

복음이 없는 기독교 역사가 3백 년 동안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다 18세기에 모라비아 형제단의 선교사들이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원주민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선교 지역

 

19세기에는 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로 온 이민자들이

소규모 개신교 공동체를 설립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주류 세력에서 벗어나 있는 엘리트 집단 같은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게 확장되지 못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미국에서 들어온 오순절 교회를 시작으로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개신교도의 숫자가 크게 늘었고, 상대적으로 가톨릭교도의 숫자는 많이 줄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종교 비율 변화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95년에 한국의★ 권신찬 목사가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국의 한 도시에서 전도집회를 열고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 집회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멕시코에 복음의 말씀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21세기에 들어와 점점 멕시코 전역을 비롯해 남쪽 나라들에 복음이 전파되어

현재는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이제 고대 문명 아스테카가 자리 잡고 있던 멕시코 전 지역에는

복음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또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에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잉카 문명이 자리 잡고 있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에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에도

1986년에 권신찬 목사가 직접 가서 설교했던 집회를 계기로

한국인 이민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브라질 현지인들과 주변 국가에서 브라질로 이민 온

스페인어권 이민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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