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기독교가 전해지기까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은
종교적 상황이 복잡해진 유럽 밖의 새로운 곳으로
가톨릭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과 일본에도 가톨릭 신부들이 파견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인 장수들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가톨릭 신부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부대원들은 가톨릭 교인이었고,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종군 신부의 자격으로 고니시를 따라
부산으로 와서 1년 동안 창원에 머무르다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관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입니다.
조선에 가톨릭이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것은
중국을 통해서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천주교를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학문으로 여겨
‘서학’이라 부르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03년에 중국 사람들을 위해 쓴 천주교 입문서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조선에 전해졌고,
이를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중에는 정조 시대에 수원 화성을 설계했던
학자 정약용과 그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사상은 조선의 유학과 맞지 않았고,
서양 국가들이 침략할 것이라는 위기감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천주교는 조선에 서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고 난 후에
개신교에서도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피부색과 머리 색이 다른 서양인들이 직접 조선인을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의 한 선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외교 협약 없이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접근해 무역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고,
결국 조선 군인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가 배에서 헤엄쳐 나와 중국어로 된 성경을
대동강 주변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전하고 사망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배를 불태운 이 일로 인해 신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조선이 일본을 시작으로 서양 국가들과도 수교를 시작하면서
개신교 역시 정식으로 포교를 허락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회가 1884년, 미국 북감리교회가 1885년,
침례교가 1889년에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했고,
성공회와 캐나다 장로교회까지 차례로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등입니다.
이 중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웠고,
북장로회의 언더우드는 훗날 연세대학교로 발전되는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이 세워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이후에 미국 공사까지 역임하면서 개화기 조선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파견한 선교사들로 인해
조선에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의 역사
조선에 선교사가 파견되는 과정을 보면,
상대적으로 서양에 잘 알려진 중국과 일본에 먼저 선교사가 파견되고,
이후 조선에도 선교사가 파견되었는데, 성경 번역 역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조선 시대 지식층은 중국에서 만든 한문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대부분 한자를 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 기독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회에서 중국 만주 지역으로 파견된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는 그 사실을 알고 국경 지역에 머무르면서
한문을 한글로 번역할 수 있는 조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이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그 과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평안도 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한국어를 배웠고,
만주에서 조선 사람들이 중국어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그리스어와 영어 성경과 대조하며
내용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성경 번역을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누가복음이 번역되었고,
1882년 3월에 완성되어 3천 부가 인쇄되었습니다.
이후에 요한복음, 마가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순으로 번역되어
각각 3천 부에서 많으면 5천 부씩 인쇄되었으며,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체가 번역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중국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인쇄되었는데,
제대로 된 한글 활자가 없어서 목판에 글자를 직접 새긴 후
일본에서 납 활자 4만 개를 제작한 후에야 성경을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에 문광서원에서 간행된 누가복음.
장은 표시하고 절은 표시하지 않았다.
평안도 방언의 흔적이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성경 번역은
‘본문의 의미와 한국어의 관용어에 적합한 절대적인 직역’이라는 원칙과 ‘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민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는 원칙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원칙에서 중요한 것은 ‘직역’된 표현과 ‘민중의 언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직역은 그 나라 말에 없는 표현이라 당장 이해가 안 되더라도
단어 뜻 그대로 번역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성경의 내용을 한국 사람들에게도 정확하게 전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을 보다 널리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우리말 성경 번역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성경을 준비했다면,
일본에서는 조선인 이수정이 일본에 머물면서 세례를 받고
중국어 성경에 우리말로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縣吐漢韓新約聖書)>를 발간했습니다.
1884년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된 이 책에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83년 4월에 일본 도쿄에서 세례를 받고
미국성서 공회 선교사 조지 녹스, 헨리 루미스 등과 함께 찍은 사진.
그 후 이수정은 곧바로 한글 성경 번역에 착수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 길이가 가장 짧고 표현이 간결한 마가복음을 번역했고,
이 책은 1885년에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때 고유 명사를 가능한 한 그리스어 원문 발음대로 표기하려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국식 표현인
‘야소기독(耶蘇基督)’ 대신에 ‘예슈쓰 크리슈도스’라고 번역했습니다.
1885년에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는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후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선교사 파견을 허용하자
중국과 일본에서 준비된 성경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번역된 성경은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 나갔고,
일본에서 번역된 마가복음언해 성경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와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초기에 번역된 성경들은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1887년 2월에 성경 번역을 위해 한국으로 파견된
다양한 교파의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이 모여 ‘성서번역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참여한 사람들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턴, 헤론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마가복음을 개역하여 출간했습니다.
이는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복음서를 차례로 출판했습니다.
1892년에는 마태복음이
‘마태복음전’이라는 이름으로 인쇄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번역된 로스 버전의 신약성경을 수정했고,
성경 전체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작업은 한국인 한두 명과 선교사 한 명이 팀을 이루어
신약의 각 권을 그리스어와 영어 개역성경(RV)과 비교해서
재검토하고 번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896년 겨울부터 매주 세 차례, 한두 달간의 합숙을 하면서
1900년 7월에 신약성경이 모두 번역되어 ‘신약전서’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번역상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그래서 1902년 3월부터 재개정 작업에 들어가 6월에는 목포에 모여
공동으로 번역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목포로 배를 타고 내려가던 아펜젤러와 조한규가
군포 근처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이 일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작업했던 성경 번역 자료도 같이 수장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 번역 작업을 멈추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과 선교 단체들은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선교 일과 번역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하던 이들 중에
몇 명을 전임 번역자로 임명한 것입니다.
선교사 게일과 언더우드, 레이놀즈와
조선인 이창직, 정동명, 송덕조, 김정삼, 이승두가 전임 번역자로 임명되었고,
이들은 4년 동안 552회에 달하는 모임을 갖고 몇 번의 개정 작업을 통해서
1906년에 신약 개정 최종본을 완성했습니다.
이 책은 총 2만 부가 발간되어 조선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 후 이들은 곧바로 구약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시편을 먼저 번역했던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와
선교사 글리던 크램 등이 합류하면서 이 일의 진행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11년에 구약성경도 번역이 완료되어
신구약 성경 전체 우리말 번역이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된 한국어 성경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구약성경을,
1938년에는 신약성경을 재개정하여 완성도를 높였고,
한국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수정되어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간행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전쟁 중에서도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한글판 성경은
존 로스가 중국 만주에서 1887년에 만든 성경을 기초로 하여
한국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레이놀즈 등이 1911년에 완성한 것을
1938년에 재개정하고, 1952년에 한글맞춤법에 맞게 수정하고,
1961년에 일부 수정을 거친 것입니다.
1911년부터 1961년까지 50년 동안,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영어 등 온갖 외국어 사본과의 비교를 통해
정확도가 검증되었고, 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져 나갔습니다.
1911년에 완성된 성경전서를 기본으로 1930년에 편찬된 성경전서.
대영 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아 발행되었다.
장과 관주를 제외하고는 순 한글로 되어 있다.
개역한글 성경은 1911년 이후로 한국 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현대어로 된 새로운
번역 성경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개역한글 성경을 개정하여 출판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67년에 출간된 ‘새번역’ 성경이고,
두 번째는 새번역을 다시 개정하여 1993년에 출간된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번역 오류에 대한 논쟁이 있어
2001년에 개정판 ‘새번역’ 성경이 출간되었습니다.
또 1998년에 출간된 ‘개역개정’ 성경이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입니다.
1968년 1월에 공동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71년 4월에 신약성경이,
1977년 4월에 구약성경이 완성되어 공동번역 성경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성경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한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개역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공동번역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개역한글과 비교하면 새번역은 문투와 일부 단어가 바뀌었습니다.
반면에 더 늦게 번역된 개역개정에서는 문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단어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문투와 단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새번역과 개역개정 모두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을 진행한 것이지만,
이 번역본들은 발간 목적이 서로 달랐습니다.
새번역은 성경을 조금 더 쉬운 현대어로 변경하여 젊은 층과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쉽게 성경을 접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면,
개역개정은 개역한글을 본격적으로 대체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은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개역한글의 문체는 그대로 유지한 채,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현대 단어로,
과거의 맞춤법을 현대 맞춤법에 맞추어 변경했습니다.
이 목적에 따라서 개역개정이 발간된 후로 한국성서공회에서는
개역한글 성경의 인쇄를 대부분 중단하고 개역개정판으로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에서는 개정개역판 성경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성경 번역의 역사는 한국 교회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했던 이들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도 그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 인쇄되어 전달되게 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국에 들어왔던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교파와 상관없이
가장 먼저 성경을 번역하고 전파하는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교리 문제로 갈등을 빚고 대립하던 교파끼리도
성경을 번역할 때는 서로 협력했습니다.
각국의 성서공회는 기부금을 모금해서 번역팀을 유지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목적하에 성경이 대중의 언어인 한글로 번역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번역본을 수정하고 개정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해서 한국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펼칠 때도,
한국 전쟁으로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에도 계속해서 이어져 온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성경을 아무 어려움 없이 읽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개개인에게까지 닿아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몇 사람의 노력과 열정,
혹은 학문적, 언어적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전해진 성경을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그랬듯이
소중히 생각하면서 읽고 더 정확하게 이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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