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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교회사 7(세계 대전과 미국에서의 복음 전파)

by 우연! 2024.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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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

17세기부터 많은 영국인들이 정치적, 종교적 탄압을 피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습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부 대서양 연안에 식민지 13개 주를 세웠고, 이주민들은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영국은 미국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에 항의했고, 1774년에 대륙 회의를 결성하여 영국에 조직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미국 초기 13개 주

 

 

1775년에는 미국 독립 혁명이라고도 알려진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1776년에는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독립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했으며,
그 권리에는 생명권과 자유권 및 행복 추구권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간은 정부를 만들었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통치받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어떤 정부라도 이 목적을 훼손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
 

식민지군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1783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1787년에는 미국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밝힘으로써

세계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1791년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정 헌법 제1조가 포함된 권리 장전이 발표되었습니다.

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해서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미국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로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그 후 미국은 대륙의 서부를 개척했고,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과 영토 확장

 

 

1803년에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대규모의 땅을 매입하여 국토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이곳을 ‘루이지애나 매입지’라고 하는데,

이때 루이지애나와 미주리, 아칸소, 아이오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오클라호마,

캔자스 대부분과 콜로라도, 와이오밍, 몬태나, 미네소타가 미국 연합에 포함되었습니다.

또 이 시기에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시주도 미국 연합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미국 지도가 완성된 것은 1959년의 일입니다.

이때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미국 땅에 포함되었습니다.

 

&. 대각성 운동과 전쟁

18세기에 영국에서 복음 부흥 운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조지 휫필드가 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미국에 총 일곱 번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로 인해 미국에서도 복음의 부흥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미국 독립 운동 전에 일어난 복음 부흥 운동을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합니다.

미국이 독립한 후로는 국토의 면적이 넓어지면서 인구도 점차 늘어났습니다.

1790년에는 동부 해안에만 약 400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40년 후인 1830년에는 인구가 1,300만 명 정도로 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1,7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서쪽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 시기에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 전쟁 이후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광활한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에 복음은 크게 전파되어 갔습니다.

 

 

1790년 북아메리카 인구 분포

 

 

 
1830년(왼쪽)과 1840년(오른쪽)의 미국 인구 분포
 

 

당시 복음을 전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랜시스 애스버리가 있습니다.

그를 미국으로 보낸 사람은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그의 스승인 영국의 존 웨슬리였습니다.

웨슬리는 그에게 미국의 광활한 황무지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순회 전도자’라고 불리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말을 소유해야 했고, 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순회 전도자들은 각자 순회하는 경로가 정해져 있었는데, 보통 320~800㎞ 정도를 다녔습니다.

2~6주마다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헛간, 학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프랜시스 애스버리(1745~1816)
 

2차 대각성 운동의 또 다른 대표적인 모습으로 ‘캠프(camp) 집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때로는 4~5일간, 길게는 3~4주간 집회를 열었습니다.

2차 대각성 운동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제임스 맥그리디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황무지를 돌았습니다.

그는 주로 로그스 하버(Rogues harbor), 즉 ‘도적들의 항구’라고 불리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은 이름에 걸맞게 도주 중인 도둑, 살인자 등 온갖 범죄자들이 숨어 살던 매우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맥그리디는 이러한 곳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제임스 맥그리디(1763~1817)
 

맥그리디가 복음을 전하자 범죄자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곧 그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정말 생생하게 해서 지옥에 대해 설명할 때는

듣는 사람들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온갖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들이었지만

지옥에 대해 듣고서는 ‘아, 나는 지옥에 가겠구나!’ 하고 두려워했고,

복음을 들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또 자신들이 들은 것을 지인들에게 전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맥그리디에게 데려왔습니다.

맥그리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 중 바턴 워렌 스톤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도 황무지에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작은 교회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들으러 찾아온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야외에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의 첫 집회는 켄터키주의 케인 리지에서 열렸습니다.

이때 2만 명에서 2만 5천 명 정도가 설교를 들으러 왔고, 집회는 여러 날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 집회에서는 바턴 워렌 스톤뿐 아니라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목사들도 차례대로 설교했습니다.

 

케인 리지 집회(1801)
 

그런데 참석자들의 반응으로 인해 이 집회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들은 내용에 크게 감동한 집회 참석자들은 때로는 너무 두려워해서 무서워 떨고 심지어 기절까지 했으며

복음을 깨달았을 때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보수적인 전도자들은 엄숙한 분위기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비판했지만,

집회 참석자들은 복음을 통해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집회는 케인 리지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감리교인들이 1819년에 개최한 집회를 묘사한 그림.
 
 
 앞쪽에는 한 사람 이 기절한 채 누워 있는데,
이를 통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감정이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차 대각성 운동의 대표자 가운데 찰스 피니가 있습니다.

변호사였던 그는 1821년에 거듭난 후 경력을 포기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뉴욕시에서 시작하여 뉴욕주, 델라웨어주, 펜실베이니아주로 범위를 넓혀 나아갔습니다.

사회 개혁에도 관심이 많았던 찰스 피니는 강단에서 노예 제도를 자주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시 노예 제도 반대 정서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찰스 피니(1792~1875)
 

미대륙의 노예 제도는 1619년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후부터 노예 제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정착민들 중 다수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었는데,

일부는 성경에 노예 제도가 문제 없다고 적혀 있으니 괜찮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성경은 노예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노예에게 성경을 가르치면 주인에게 더 순종하게 될 것이라며

성경 공부를 허락했지만, 어떤 이들은 노예에게 성경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무렵 노예 사회에는 흑인 목사들이 설교하는 교회도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찰스 피니의 제자 중 하나인 시어도어 웰드는 노예 제도 반대 운동에 대한 글을 여러 편 썼고,

이를 통해 많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 중에

미국 문학의 위대한 고전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가 있습니다.

당시 노예들의 삶을 묘사한 이 책은 1852년에 출간되자마자 100만 부가 팔리는 등 큰 인기를 끌었고,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스토 부인을 만나서

“당신이 이 큰 전쟁을 일으킨 작은 부인이군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
 

링컨이 언급한 ‘이 큰 전쟁’은 노예 제도 폐지를 두고 일어난 미국의 남북 전쟁입니다.

1861년부터 4년간 벌어진 남북 전쟁은 노예 제도를 종식시켰지만, 여러 사회적 문제를 남겼습니다.

실업자, 노숙자, 질병과 빈곤 문제가 속출했고, 기독교가 두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데 집중하는 부류와, 복음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빈곤한 사람들을 돕는 부류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때 제3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D. L. 무디(1837~1899)

 

 3차 대각성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D. L. 무디입니다.

그는 양심상 전쟁에 참전할 수 없었기에 대신 전쟁터에 가서 병사들에게

신앙 상담을 해 주는 것으로 군인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시카고에서 기독교 청년회(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빈민가 선교 사업에 참여했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주일학교는 커져서 나중에 아주 큰 교회가 되었고, 무디는 매우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1871년에는 시카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교회와 무디의 집, YMCA가 모두 불탔습니다.

이로 인해 무디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해야 하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었기에

임시로 건물을 짓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디는 시카고뿐만 아니라 북미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음악가들도 무디의 전도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무디를 지원한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아이라 생키, 필립 블리스, 패니 크로스비가 있습니다.

아이라 생키는 무디의 많은 전도 여정에 동행하며 일했던 성악가로,

무디가 설교하기 전에 나와 찬송을 인도했습니다.

그는 찬송가 342장 “어려운 일 당할 때”, 349장 “나 주의 도움받고자”,

39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와 같이 우리가 오늘날 부르는 찬송가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라 생키(1840~1908)
 
필립 블리스(1838~1876)

38세의 나이에 열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필립 블리스도 많은 찬송가를 남겼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로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과 276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가 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1820~1915)
 

시각 장애를 가졌던 패니 크로스비는 무디가 사역하는 30여 년 동안 수많은 찬송 시를 썼습니다.

찬송가 187장 “너희 죄 흉악하나”,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446장 “오 놀라운 구세주”를 작시했습니다.

 

 

초교파적 전도자였던 무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 무렵 학생들 가운데 해외에 복음을 전하자는 큰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이 일은 프린스턴 대학의 거듭난 학생 다섯 명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들에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때마침 무디가 고향 매사추세츠주의 노스필드에서 한 달 동안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큰 모임을 열었습니다. 그 모임의 목적은 해외 선교와 전혀 관계가 없었으나

학생들이 모임 후에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맞추어졌습니다. 한 달간의 성경 공부 집회가 끝나는 시점에는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 학생 수가 99명이었고, 그다음 날에 한 명이 더 합류하여 총 100명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기념하는 명판이 무디가 살았던 노스필드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1886년 7월 제1회 국제 학생 수양회가 열렸을 때 이 방에서 ‘학생 자원 운동’이 시작되었고,
100명의 청년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 선교사가 되겠다는 의지와 열망을 표명했다.

그 후 몇몇 청년들이 다른 대학으로 가서 ‘학생 자원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소식은 점점 더 퍼져 나갔습니다.

그해 말에는 해외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지원자가 2,200명에 달했습니다.

그중에는 여성 지원자들도 있었습니다.

 

학생 자원 운동 기념 명판
 

1891년에 320명의 젊은 대학생들이 해외로 나가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1886년부터 1930년까지 50년 동안 20,500명의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습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많은 선교 단체들도 선교를 위해 여러 사람을 전 세계로 파송했습니다.

그중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있습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인 그는 한국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최초의 기독교 고아원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최초의 한국어 찬송가 책을 출판했으며,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위원회의 의장직도 맡았습니다.

그는 YMCA 서울 지부를 설립하는 일을 도왔고, 1915년에는 조선 기독교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입니다.

 

언더우드(1859~1916)
 

복음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에 전파되었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식민지들은 하나하나 독립했고,

영국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국제적, 정치적으로 급격한 상승세를 타고 강력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선교 운동은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전쟁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우울하게 만들었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제4차 대각성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순전히 성경만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4차 대각성 운동을 이끈 사람들 중에 빌리 그레이엄과 빌리 브라이트가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평생 전 세계 185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설교자입니다.

22억 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그중 현장에서 설교를 들은 사람은 2억 5천만 명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빌리 브라이트는 학생층에 집중하며 ‘대학생 선교회(CCC(Campus Crusade for Christ))’를 설립했고,

미국 전역과 해외 대학 캠퍼스의 모든 학생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지와

소책자를 만들며 일꾼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191개국에서 225,000명의 자원봉사자를 양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복음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일 뿐입니다.

 

&.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역할

헌법이 보장해 주는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국가나 종교로부터 오는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웠던 미국에서는 누구나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수많은 교회와 교단, 각기 다른 형태의 기독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교단과 종교 단체를 초월하는 것이며, 구원은 하나님과 각 개인 사이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있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누구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참복음이 빠진 채 외형만 전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들도 결국 후에 참복음이 전해지는 데

밑거름으로 사용하셨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서 1:18)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해졌고,

그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60년대에 한국에서도 복음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한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서 다시 복음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한국에서★ 세계 여러 곳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회사 전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렇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지금은 매우 독특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는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독립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을 눈으로 보며 살고 있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 무신론 사상이 대두되었을 때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의 유적들이 발굴됨으로써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듯이,

무신론 사상이 더욱더 강하게 팽창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2:14-17)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 구절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27-29)
 

성경은 많은 고난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을 위해 협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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