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하신 말씀대로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본의 내용이 정확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많은 사람이 그 내용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성경책의 보급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책 한 권을 제작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거나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면 성경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쇄술의 발명은 성경을 널리 보급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유럽의 인쇄술 발명 시기가 종교 개혁 시기와 맞물리면서 다양한 성경의 번역본들이 더욱 널리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역사 속의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성경 사본 제작의 역사
1) 사본 제작에 사용된 종이
모세는 파피루스라는 식물로 만든 종이에 모세 오경을 기록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BC 3000년경부터 파피루스 종이에 글을 썼는데,
BC 1500년경에 활동했던 인물인 모세도 파피루스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대과 식물입니다. 파피루스의 줄기를 갈라 목판 위에 가로세로로 늘어놓고서 그 위에 물을 뿌리며 두들겨 압착시킨 것을 햇빛에 말리면 단단한 종이가 되었습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종이로 제작하기가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모세가 파피루스에 성경을 기록한 것이었고, 신약 시대에 사도 요한도 파피루스 종이에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이서에는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요한2서1:12)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한 종이가 파피루스입니다.
그런데 파피루스 종이는 오래 보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원본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필사하여 사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파피루스 이후에 사용된 종이로 양피지가 있습니다. 동물 가죽을 가공하여 종이처럼 만든 것인데, 양의 가죽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기에 양피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염소나 송아지 가죽도 사용되었습니다. 양피지는 BC 500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BC 200년 이후부터는 보편화되었습니다. 양피지에 대한 기록은 디모데후서에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4:13) 라고 했습니다. 이 ‘가죽 종이’가 바로 양피지입니다.
양피지를 만드는 과정은 조금 복잡했습니다. 가죽을 얻기 위해 먼저 동물을 죽여야 했고, 동물의 털과 가죽 안쪽의 피지를 다 제거한 후 가죽만을 말려서 만들었습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 종이보다 내구성이 좋았기 때문에 양피지가 보급된 후로는 성경이 점차 파피루스 종이 대신 양피지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2) 제책 방식의 변화
성경은 처음에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글이나 그림을 파피루스 종이에 기록하고 종이 양끝에 막대를 붙여 말아서 보관했습니다. 양피지 제작 방법이 보급된 후로는 양피지로 두루마리를 만들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일반적으로 세로 폭이 7.5cm에서 30cm 정도 되었고, 길이는 보통 10m정도였는데, 40m 정도 되는 긴 것도 있습니다. BC 100년경에 발견된 사해 사본도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였습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제작 과정이 복잡했고, 제작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많은 동물을 죽여야 했기 때문에 가격이 굉장히 비쌌습니다. 양피지로 두루마리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 20마리에서 30마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또 두루마리 형태로 된 책은 필요한 내용을 그때그때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두루마리를 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성경책은 코덱스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현재의 책처럼 여러 장의 한쪽을 묶은 형태를 코덱스라고 하는데, 이 방법은 AD 100년에서 200년 정도부터 사용되어 400년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양피지를 사용해 코덱스 형태로 성경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송아지 160마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코덱스 형태의 책은 양피지의 양쪽 면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의 내용을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었고, 필요한 내용을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양피지로 만든 코덱스를 제일 먼저 사용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사복음서를 한 권으로 묶었고, 또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한 권으로 묶었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이 아닌 다른 책들도 모두 코덱스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3) 인쇄술의 보급
1455년경에 이동식 금속 활자로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도 양피지를 가지고 코덱스 형태로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양피지를 코덱스 형태로 만들 때 동물의 가죽이 굉장히 많이 필요했기에 가격이 매우 비쌌습니다. 양피지로 된 구텐베르크 성경의 가격은 100~120굴덴으로, 당시 큰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성경책을 쉽게 사고팔지 못했고, 실제로 집이나 땅을 가지고 성경책을 거래했다고 합니다. 12세기경에는 유럽에 제지술이 전파되었고 그 뒤 서서히 종이로 된 책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구텐베르크가 초기에 종이에 인쇄한 성경책은 60굴덴 정도로 작은 농장의 가격과 맞먹는, 역시 매우 비싼 것이었습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이 직접 성경을 필사했습니다. 한 사람이 성경 한 권을 필사하는 데는 1년에서 2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따라서 필사를 한 성경책은 값이 매우 비쌌고, 평범한 사람들은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짧은 시간에 많은 성경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가격도 집 한 채 정도의 값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인쇄기로 인쇄한 성경은 제작하는 데 2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성경의 내용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제작되면 그다음에 복사하는 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는 인쇄물의 특성에 따라, 인쇄된 성경책은 짧은 시간에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5세기 구텐베르크 시대에는 100~120굴덴이던 성경책의 가격이, 16세기 마르틴 루터 때는 5~10굴덴이 되었습니다. 또 16세기의 종교 개혁과 함께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장과 절의 구분
현재 우리가 읽는 성경은 장과 절로 구분되어 원하는 내용을 빠르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처음부터 이런 형태로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9~10세기경에 필사된 히브리어 성경인 알레포 사본만 하더라도 장과 절 대신에 열린 문단과 닫힌 문단으로 내용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행이 바뀌면서 새로운 줄로 시작되는 것이 열린 문단이고, 같은 행에서 몇 자를 띄어서 쓴 것을 닫힌 문단이라고 합니다. 처음 성경은 이와 같이 문단과 단락으로 구분되었는데, 그 형태가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에 동그라미 표시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이 구분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입니다. 처음 성경의 장을 구분한 사람은 13세기 초의 스티븐 랭턴이라는 영국인입니다. 그가 성경 전체에 있는 장을 구분했고, 그 형식이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절은 16세기 프랑스의 로베르 에스티엔이라는 사람이 나누었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이 구분되면서 성경을 찾아 읽기가 편해졌고, 이 형식이 보편화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 성경 번역의 역사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이후 페르시아 제국 시대까지 그 인근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후 헬라 제국의 통치를 받을 때는 헬라어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을 때는 라틴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아람어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가 십자가에 히브리, 로마, 헬라 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었던 배경입니다. (요 19:20 참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 때문에 여러 나라의 침략을 받았는데, 그런 역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 민족에게 전해질 준비가 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6-27)
1)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 칠십인역 성경
구약성경은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을 정복한 제국에 대한 역사를 예언한 다니엘 2장부터 7장까지의 내용은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또 에스라에서 왕의 조서가 나오는 부분도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당시 이방인들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모세 때부터 시작해서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 시대까지 기록되었는데, 헬라 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시기에는 히브리어를 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많아져 헬라어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BC 250년경에 이집트 땅을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하기 위해 유대인 율법 학자 72명을 초대해서 모세 오경을 72일 만에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헬라어 구약성경을
‘칠십인역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 오경 외에 나머지 성경들도 BC 100년경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헬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내용도 칠십인역 성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5절의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는 부분은 칠십인역의 시편 40편 6절과 일치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의 회당마다 성경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구약성경은 칠십인역을 통해 헬라어로 번역되었고,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칠십인역은 초대 교회 시절,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전해질 때 이방인들도 구약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해 준 아주 중요한 성경입니다.
2) 성경의 라틴어 번역 - 불가타 성경
로마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동쪽은 헬라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라틴어와 헬라어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로마의 서쪽은 라틴어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서로마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라틴어 성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필사해 왔지만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번역일 뿐이었고 손으로 베껴 쓰다 보니 오탈자도 있었습니다.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이 시기에 서로마에 살던 히에로니무스는 헬라어로 된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400년경에 히브리어 성경을 바탕으로 구약성경을 다시 번역했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히브리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들을 구해 직접 라틴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때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외경들도 함께 라틴어로 번역했으나, 모두 정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의 라틴어 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성경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었고, 또 히브리어 구약 사본과 직접 비교하면서 라틴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원문의 뜻을 더욱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 번역은 오랜 시간 자료들을 수집하여 비교 분석하고 정리해야 하는 대작업이기에 자료를 보관할 수 있는 넓은 장소와 집중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이 있어야 했습니다.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는 언제라도 피신해야 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작업이었으나,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안정된 환경 아래 성경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 성경은 널리 전파되었고, 13세기경부터 ‘불가타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불가타라는 말에는 라틴어로 ‘대중본’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귀족들이 사용하던 고전 라틴어에 가까운 말이 아니라 서민들이 사용하던 라틴어를 사용해 번역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평민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라 품위가 없고 천박하다고 배척을 받아 히에로니무스 사후 수백 년 동안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7세기가 되어서는 모든 성경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이 성경을 라틴어 성경 중 가장 공신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1611년에 완성된 킹제임스 성경도 불가타 성경을 다른 성경과 함께 참고해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불가타 성경은 지금까지도 그 권위를 인정받아 가톨릭교회에서 라틴어 표준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종교 개혁 이후에 진행된 각 나라의 성경 번역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 서유럽 지역에는 라틴어 이외에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세워졌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도 그들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라틴어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알비파 사람들이 프랑스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인 1229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수 없다는 조항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14세기, 15세기에 영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14세기 영국 옥스포드의 위클리프라는 학자는 영국 사람들에게 영어로 성경을 읽게 하고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권위가 교황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고, 그의 사후에 교황청에서는 그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1408년에는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위클리프 성경을 금지하는 조항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본문이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존 위클리프 시대나 그 후에 만든 책자를 읽어서도 안 된다.
이 조항은 성경의 영어 번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것이었고, 조항을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세 시대 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럽에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서유럽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원어 성경 사본들이 대량 유입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에서 채택한 성경이었던 불가타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어 성경은 불가타 성경보다 내용이나 권위적인 면에서 더 인정받았습니다. 원어 성경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종교 개혁이 지속되면서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로 활발하게 번역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 유럽에 전해진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사본
유럽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 사본들이 들어오게 된 데는 제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는 지중해를 품고 있는 광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지만, 헬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헬라어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395년경에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와 비잔티움, 곧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동로마 지역에는 헬라 제국의 영토였던 곳이 포함되어 있어 헬라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고, 많은 사람이 헬라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반면에 서로마 사람들은 라틴어를 많이 사용했기에 라틴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하고 여러 나라로 나뉘었지만, 동로마는 그 후로도 약 천 년 동안 지속되다가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오스만 제국이 확장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고,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동로마 사람들이 서유럽 쪽으로 이주했고 그로 인해 동로마의 헬라 문화가 서유럽으로 전해졌는데, 이렇게 서유럽에 유입된 그리스 문화는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새로운 부흥’을 의미합니다. 중세 시대 전에 번창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동로마 사람들이 보던 헬라어 원어 성경 사본들도 함께 서쪽으로 전해졌고, 서유럽 사람들은 불가타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헬라어 성경 사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사본이 유럽에 유입된 것은 스페인 지역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의 도움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던 해로 알려진 1492년 당시, 스페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해에 스페인에서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497년에는 이웃 나라인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이 추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보던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대로 두고 쫓겨났는데 그것을 서유럽 사람들이 입수하면서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원어 성경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
서유럽 사람들이 원어 성경에 관심을 보였음을 증명하는 주요한 인물이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히메네스라는 사람으로, 스페인의 추기경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1500년경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알칼라데에레나스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중 언어로 된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이 성경의 이름은 ‘콤플루툼 폴리글롯’인데, ‘콤플루툼’은 알칼라데에레나스의 라틴어 지명이고, ‘폴리글롯’은 여러 언어라는 의미입니다.
콤플루툼 폴리글롯 성경의 창세기 1장. 상단 왼쪽부터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하단에는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번역한 성경(왼쪽)과 아람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오른쪽)이배치되었다.
이 성경은 가운데에 라틴어 불가타 성경, 왼쪽에는 헬라어 성경, 오른쪽에는 히브리어 성경이 배치되어 세 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메네스가 세 가지 언어를 함께 보면서 성경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형태로 성경을 제작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에라스무스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사제였습니다. 그는 원어 성경들을 보면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재검토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개정하고 보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의 이와 같은 생각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때까지 불가타 성경은 아주 권위 있는 성경으로 여겨졌고, 어느 누구도 불가타 성경의 정확성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그 일을 시작했고, 1516년에 신약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은 두 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왼쪽에는 헬라어 사본의 본문을, 오른쪽에는 헬라어 사본을 보면서 자신이 새롭게 번역한 라틴어 번역본을 배치했습니다.
불가타 번역본에서 새롭게 개정된 라틴어 번역본이었던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새로 번역한 것이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 권위와 내용의 정확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이 성경으로 인해 새로 번역된 성경도 권위를 가질 수 있음이 인정되었고, 이는 후에 종교 개혁가들이 성경을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는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3)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였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은 이후,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517년에 로마 교황청에서 면벌부를 발행하는 것을 반대하며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했는데, 로마 교황청에서는 1521년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했습니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해 있으면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보았던 헬라어 원어 성경은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신약성경이었습니다. 루터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보면서 독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1522년 9월에 출판했습니다. 이 이유로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9월 성경’이라고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루터는 12년에 걸쳐서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입수할 수 있었던 히브리어 원어 성경과 라틴어 불가타 성경, 그리고 칠십인역 헬라어 성경을 참고하면서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1534년에 번역을 마치고 독일어 신구약 완전본 성경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이후, 성경 번역은 다른 언어로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종교 개혁가들은 위클리프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권위가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많은 사람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널리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이 복음을 깨닫는 역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신약성경을 처음 출판한 그 이듬해인 1523년에는 성경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래 표에서 루터 성경의 중역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의미입니다. 1524년에는 덴마크어 성경이 루터 성경에서 중역되었고, 1526년에는 영어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사람이 헬라어 성경과 루터 성경을 바탕으로 영어 성경을 번역했는데, 그는 이렇게 성경을 번역하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어서 스웨덴어, 프랑스어, 핀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로도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1523년 네덜란드어(루터 성경 중역) 1524년 덴마크어(루터 성경 중역) 1526년 영어 틴들 성경(그리스어, 루터 성경 사용) 1526년 스웨덴어(루터 성경 중역) 1535년 프랑스어 프로테스탄트 성경(여러 성경본 사용) 1548년 핀란드어(그리스어 직역) 1569년 스페인어 완전본(히브리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직역) 1607년 이탈리아어 프로테스탄트 완전본(히브리어, 그리스어 직역)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본을 사용하고 여러 성경본 참조)
이처럼 성경이 번역되는 일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어 갔습니다.
칠십인역 헬라어 번역 성경이 제국의 역사 속에서 준비되었고, 이를 통해 초대 교회 시대에 이방인들이 사는 각지로 복음이 전해질 때 아주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또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동로마 사람들이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헬라어 성경이 서유럽에 전달되었고, 원문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 의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명 또한 새롭게 번역된 성경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역사는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이고, 복음이 이방인인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세세하게 이끌어 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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