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 개혁
1) 영국의 종교 개혁
영국에는 2세기경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기에는 존 위클리프를 통해 종교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고, 헨리 8세가 통치하던 16세기에는 종교 개혁에 대한 열망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이라는 왕궁 시녀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로마 교황청에서는 왕비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왕을 영국 국가와 교회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로 하는 법률인 수장령을 제정했습니다.
수장령이 시행된 후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국 성공회(聖公會)입니다. 헨리 8세는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했고, 수도원의 많은 재산과 토지를 영국 왕에게 귀속시켰습니다. 로마 교황청에 세금을 내던 것도 중지하고, 로마 교황청에서 행사하던 재판권, 성직자 임명권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열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는 칼뱅주의 성향의 개신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친개신교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따라 성당 안에 있던 성상이 제거되었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진행해 오던 미사가 중지되고 영어로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성찬식 때는 평신도에게도 떡과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열다섯 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그의 이복 누이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성공회 성직자들과 개신교도를 투옥하고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처형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메리 1세 사후에는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지정했고,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던 청교도를 탄압했습니다. 이에 청교도인들은 영국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청교도라는 말은 토마스 플로가 1563년에 출간한 <대형 교회사>라는 책에 처음 등장합니다. 영어로는 ‘퓨리탄(puritan)’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스스로 일컬은 말이 아니라, 청교도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려고 쓰기 시작한 말입니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위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 때는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져 청교도의 해외 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1608년에는 4백여 명의 청교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갔고, 1620년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편찬하기도 했던 제임스 1세는 아들 찰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청교도는 국가와 교회에 악질 전염병과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 때에는 청교도에 대한 박해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1642년부터 시작된 청교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청교도인들이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이때 약 10년 동안 8만여 명의 청교도인들이 영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결국 내전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찰스 1세가 이끌던 왕당파에 승리를 거두었고, 찰스 1세는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의회파를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공화국이 설립되었습니다.
2)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
17세기 중반 영국에는 존 버니언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청교도이자 복음주의자로 잘 알려진 그는 목사이면서 작가였습니다.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존 버니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청교도 출신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청교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장인은 신앙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었는데, 존 버니언은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복음의 내용이 담긴 책을 읽고는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후에는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성공회 교리 외의 다른 가르침은 어떤 것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던 12년 동안 <천로역정>을 저술했습니다. <천로역정>은 존 버니언이 자신의 신앙적 여정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에 비유해서 쓴 소설입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무거운 죄의 짐을 등에 지고 멸망을 앞둔 고향을 떠나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가 좁은 문을 통과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늘나라에 도달하는 내용이 소설의 1부이고, 크리스천의 아내와 자녀들이 그의 뒤를 따라 순례의 길을 떠나는 내용이 소설의 2부입니다.
존 버니언은 수감 생활 중에 기록한 <죄인의 괴수에게 향하신 넘치는 은혜>라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거듭난 경험에 대해 상세히 밝혔습니다. 그는 복음주의 목사 기퍼드와 성경 공부를 하다가 골로새서 1장 20절의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간증했습니다.
3)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존 녹스를 들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매우 활발히 일어났던 16세기 초에 존 녹스는 위사트라는 종교 개혁가의 제자이자 호위 무사로서 종교 개혁 운동에 열렬하게 참여했습니다.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가 되어 노를 젓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후 존 녹스는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메리 1세의 기독교 탄압에 강하게 반대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스위스로 도피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칼뱅에게 수학하면서 예정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에는 에든버러에서 개혁파 교회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4) 신대륙으로의 이주
영국의 제임스 1세 때인 1620년 9월에는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출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중 30명 정도는 선박의 승무원이었고, 35명은 청교도였습니다. 66일 간의 항해 끝에 미국 케이프코드에 도착한 이들은 겨울을 나기에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찾아 12월에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을 영국에서 출발한 항구의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불렀습니다. 배에서 그해 겨울을 보냈던 사람들은 1621년 3월에 배 밖으로 나왔는데, 그동안 102명 중 49명이 죽고 53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에는 1620년에 영국에서 청교도인들 을 태우고 미국으로 건너온 메이플라워호와 똑같은 크기와 구조로 만든 모형 배 가 전시되어 있다.
이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간 청교도인들은 가정마다 제네바 성경을 한 권씩 가지고 탔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값이 매우 비쌌던 성경을 소중히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들은 미국에 도착해서 매우 엄격한 경건주의 생활을 했습니다.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켰고, 술과 담배를 금했습니다. 또 주일 예배에 빠지면 처벌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국 성공회의 전통 일부를 유지했기에 유대인들이나 퀘이커 교도, 침례 교도로부터 배척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청교도 중 주요한 사람으로는 존 카버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도착한 이듬해까지 지사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청교도인들의 모세’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신대륙에 도착한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원주민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때 존 카버는 원주민 왐피노아그 부족의 추장 마사소이트와 상호 보호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마사소이트는 청교도인들에게 옥수수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고, 다른 부족이 쳐들어왔을 때 함께 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가을에 온갖 역경을 겪고 처음으로 수확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원주민 부족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 일이 미국 추수 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존 카버의 뒤를 이어 1621년부터 약 12년간 두 번째 지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간 사람들을 ‘필그림(pilgrim)’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필그림이라는 말에는 거룩한 곳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그가 쓴 책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에는 청교도 개척자들의 생활과 당시 상황에 대해, 또 원주민들과의 관계와 전쟁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18세기 복음 운동
종교 개혁의 역사를 볼 때,
종교 개혁가들의 공통된 주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고,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모든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죄의 값을 치러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으십니다.
네 번째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시작부터 완성까지 전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사람이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의 이러한 복음주의적이고 성경 중심적인 주장은 인쇄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짧은 시간에 널리 전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16세기 초 유럽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반개혁 운동을 일으켰고, 17세기에 많은 종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 17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인간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전 유럽에 전파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1) 친첸도르프 백작과 모라비아 형제단
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일어난 30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사회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몹시 혼란하고 피폐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독일의 루터교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이며 생명이 없는 교회로 변해 가고 있었는데,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움직임을 경건주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는 실제 생활 속에서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행실을 절제하고 성실히 행하여 참된 신앙인이 되자고 주창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친첸도르프 백작은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한 2백여 년 후인 1700년에 독일 작센 지방의 신분이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경건주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던 친첸도르프는 1722년에 자신을 길러 준 외할머니로부터 베르텔스도르프의 영지를 샀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라비아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동료들이 피신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던 한 청년을 만나 그들이 그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후 친첸도르프는 책을 읽다가 자기 영토로 피난을 올 모라비아 사람들이 옛날 후스파 운동의 후예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 생애 동안 그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모라비아 교도들이 그의 영지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베르텔스도르프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집들을 지었고, 그곳에 헤른후트, 즉 하나님의 피난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친첸도르프와 약 3백 명의 모라비아 형제단의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친첸도르프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일하고 함께 교제하는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후 1731년 친첸도르프는 개종한 서인도제도 출신의 노예 한 명을 만나 그로부터 그의 동포들이 처한 어려움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친첸도르프는 그를 헤른후트로 초대해서 모라비아 형제단 사람들에게 서인도제도 노예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결과 두 명의 청년들이 서인도제도의 선교사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형제단은 적극적으로 세계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 후로 1732년부터 친첸도르프가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1760년까지 약 28년간 226명의 선교사들을 해외 여러 나라로 파송했습니다. 다른 개신교회에서 해외 선교에 눈을 뜨기 전에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선교 사역이 독일에서 모라비아 형제단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헤른후트에는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형제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공동묘지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죽고 잊혀져라.”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삶을 바치는 마음으로 선교지로 떠났던 헤른후트 선교사들의 좌우명이었습니다.
2) 감리교의 존 웨슬리
모라비아 형제단의 영향을 직접 받았던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18세기에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입니다. 존 웨슬리는 1703년 영국에서 태어나 신학을 전공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735년경에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항해하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떨던 존 웨슬리는 함께 배를 탔던 26명의 모라비아 교인들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조용히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라비아 교인들은 당시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 한 명을 찾아갔는데,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느냐,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웨슬리는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1738년에 영국으로 돌아간 웨슬리는 런던에서 모라비아 교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터 뵐러라는 젊은 선교사를 만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웨슬리는 선한 생활과 의로운 삶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뵐러는 웨슬리에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이 구원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신약 성경을 읽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단번에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3개월 후인 1738년 5월 24일에 웨슬리는 드디어 답을 찾았습니다. 그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집회에 참석해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저녁 8시 45분경에 거듭났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현재 런던 박물관 옆에는 웨슬리의 회심 기념비가 있습니다. 웨슬리가 거듭나던 날에 쓴 일기장의 내용을 동판으로 만들어서 그가 구원받았던 그 자리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자신보다 사흘 먼저 거듭난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평생을 같이하며 영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1791년에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복음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역에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3) 미국 대각성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으로 조지 휫필드가 있습니다. 171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조지 휫필드는 대학 시절부터 찰스 웨슬리, 존 웨슬리 형제와 친분을 가졌습니다. 존 웨슬리보다 3년 먼저 거듭난 휫필드는 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자마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성공회 목사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휫필드에게 강단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브리스톨시 근처에 있는 탄광의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휫필드는 1739년에 한함마운트의 들판에서 광부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시작했는데, 2백 명이 넘는 광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휫필드에게 야외 설교를 권유받은 웨슬리도 한함마운트에서 3천 명이 넘는 청중들에게 설교를 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이것이 영국의 감리교 부흥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복음이 영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을 찾았으며, 영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대규모로 일어났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일생 동안 총 일곱 번을 미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설교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크게 복음의 부흥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수만 명이 모여서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18세기의 미국 독립 운동 전에 일어났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합니다. 휫필드는 미국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인 조너선 에드워즈와 함께 1차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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