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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교회사6(미국복음부흥과 현대 교회사)

by 우연!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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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독립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1) 미국의 독립 선언

17세기에 영국은 본토를 넘어 전 세계 각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구상 모든 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한 영국인들로 인해 기독교 신앙도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때 많은 청교도인들이 미국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청교도 운동은 16세기 후반에 칼뱅의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성공회 내부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 운동입니다.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하는 영국 내전 때부터 올리버 크롬웰 시대까지의 짧은 기간에는 청교도인들이 영국 기독교인들의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에는 오랜 기간 큰 갈등이 있었고, 17세기 초에 들어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되자 많은 청교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미국 대륙으로 이주했습니다.

 

1620년에 청교도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처음 미 대륙으로 건너간 이후 미 대륙에는 13개 주의 영국 식민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세금 징수 문제로 인한 갈등을 발단으로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식민지들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미국 독립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즈음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1773년에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이 있습니다. 이때 식민지 정착민들은 영국에서 오는 물품에 대한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러한 법안은 식민지 정착민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의회에는 미국 식민지 정착민을 대표하는 의원이 없었기에 누구도 이 정책에 대해 발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법에 반발한 보스턴 시민들은 정박 중인 배 3척에 실려 있던 3백 상자가 넘는 홍차를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운동은 결국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져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 W. D. 쿠퍼, 런던 국회 도서관 소장(희귀 도서 및 특별 소장품 부문에 보관)

 

1776년 7월 4일에는 미국 식민지가 영국 본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을 공표했고, 1783년에 미국 독립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1787년에는 미국의 첫 번째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791년에는 ‘권리 장전’이라고 불리는 10개의 수정 조항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조항에는 미국 시민이 갖는 가장 중요한 권리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미국 독립 선언 존 트룸벌,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 소장

 

그중 첫 번째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회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막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1791)

 

이 헌법 조항은 미국에서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교를 정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이 내용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렇듯 미국 수정 헌법의 첫 조항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고, 따라서 미국 전역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2) 계몽주의 사상

17세기 초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 계몽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계몽주의는 과학과 지식의 발전으로부터 시작되어 사회적 변화로 이어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주의로 인해 합리적 사고에 집중하게 되었고,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과 같은 많은 획기적인 과학적 업적들이 이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전의 사상과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전통적인 세계관에도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상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러한 사상은 미국의 헌법 제정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토마스 제퍼슨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3) 무신론적 세계관의 등장

19세기를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찰스 다윈(1809~1882)은 정치와 과학계에서 무신론을 지지하는 영향력 있는 사상과 이론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입니다.

독일인 카를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계층이 없고, 대중이 모든 자본과 정치적 힘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회를 바랐습니다.

 

또 종교는 가난한 이들을 더 착취하기 위해 사후 세계를 약속함으로써 위안을 삼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를 ‘평민들에게 주는 아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이 단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는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상이었던 계층이 없는 사회는 그의 처음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는 독재 정권으로 바뀌었습니다.

영국의 찰스 다윈은 생물들이 변화된 환경에 따라 적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발전시켜 한 종의 생물이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단계까지 진화하기 위해 거쳐 온 중간 단계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해야 합니다. 진화되어 가는 중간 과정의 종들도 수십억 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중간 단계의 종들은 자연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그것들의 화석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1859년 <종의 기원>, 1871년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이라는 책을 통해 저술했습니다. 이 책들은 대중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교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다윈의 저술들은 훗날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적자생존’의 논리는 강자가 소수의 약자를 탄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4) 이스라엘의 독립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당시 미국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강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적으로도 최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이 1945년까지 이어졌는데, 전쟁이 끝나 갈 무렵에는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핵무기를 보유한 초강대국으로 도약했습니다. 즉 미국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으로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제2차 세계 대전 때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다.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은 중세 시대 때부터 박해를 끊임없이 받아 왔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겪은 박해는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거기서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홀로코스트’라고도 일컫는 집단 학살로 인해 6백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생존자들에게는 앞으로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지가 큰 문제로 남았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유대인들은 1897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의회를 열 고 ‘시오니즘’을 선언했다.

가나안 땅, 현재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설립하고 옛 히브리어를 부활시키려는 시오니즘 운동은 그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1897년 8월 29일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렸던 첫 시온주의자 의회에서 선언되었고, 그 후 세계 시온주의 기구가 설립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1920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속했고, 그 후로는 영국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일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려고 시도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부터는 유대인들의 정착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과 옛 땅을 되찾으려는 유대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영국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통치가 끝난 1948년 5월 14일에 다비드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첫 수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후 팔레스타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49년에 전쟁에서 승리하며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영토를 지켜 냈습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이라는 공인된 유대인의 국가가 존재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갈 곳이 없었던 수많은 유대인 생존자들이 정착할 수 있는 새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1948년 5월 14일에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 19, 20세기 교회의 역사

19세기 유럽에서는 산업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지식이 더해지고 물질적으로 번영하게 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이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빈부 격차도 심해졌습니다. 당시 가톨릭을 신봉했던 나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국력을 잃고 쇠퇴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 국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1) 가톨릭교회의 역사

중세 시대에는 가톨릭교회가 정치권력과 손을 잡았기에 중세 후반에는 교황의 지위가 황제나 왕들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운동이 지속되면서 18세기 이후부터 가톨릭교회는 점점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반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종교 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전통과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앞장섰던 단체가 ‘예수회’입니다.

 

예수회는 매우 엄격한 조직 체계를 갖추었는데, 그 일원들은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교황을 위해 종교 개혁 운동을 진압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이 매우 과격했기 때문에, 1773년에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회를 해체했습니다. 유럽 안에서 가톨릭의 뿌리가 가장 깊은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혁명가들이 정권을 주도하면서 여러 법을 제정했고, 이때 제정된 ‘성직자 시민법’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을 정부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성직자들을 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했습니다. 혁명가들은 가톨릭을 아예 배제하려고 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파괴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가톨릭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시 교황청과 손을 잡았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면서 대관식이 열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7세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교황을 세워 두고 스스로 자기 머리에 황제의 왕관을 얹었습니다. 가톨릭교회와 타협했으나 자신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이후인 1814년에 비오 7세는 예수회를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그 명맥은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안에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비오 9세는 1854년도에 성모 마리아론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마리아가 원죄가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교리인데, 이로 인해 가톨릭교회 안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논란을 정리하기 위해 1870년에 바티칸에서 공의회가 열렸고, 이때 교황은 교황의 발언은 성령을 통한 것이기에 오류가 없다는 내용의 ‘교황 무류성’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위치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 자크루이 다비드,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탈리아는 당시 작은 도시 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후에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했으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도시 국가들을 통일시켜 1870년에 이탈리아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때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영토를 상실했고, 교황령은 로마시 안의 바티칸으로만 한정되었습니다.

 

1900년경에는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3세가 가톨릭교회를 조금 더 현대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사회적 관심사였던 노동자의 사회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비오 10세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바티칸에서 다시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교황은 가톨릭교회 안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가톨릭교회 내에서 교황청이 가지고 있던 세속적인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조금 더 진보적인 가톨릭교회의 모습으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2) 개신교 중심의 교회 역사

16세기경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면서 인본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17세기, 18세기로 넘어와서는 인간의 이성을 가장 중시하는 계몽주의가 시작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세기에는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주창했습니다.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면서 무신론 사상이 유럽 안에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계몽주의가 가장 먼저 시작된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그 후 계몽주의는 영국으로 전해졌고, 영국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전파되었습니다. 나라마다 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의 복음주의 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독일과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루터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독일에서는 18세기에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독일 전역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첸도르프의 모라비아 형제단도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계몽주의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독일이나 북유럽의 나라들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스위스나 네덜란드, 프랑스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러한 성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18세기에 존 웨슬리를 통해서 복음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고 신앙을 회복하는 분위기가 영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보다 계몽주의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영국은 전 세계에 진출하면서 복음도 함께 전했습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는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일어난 전쟁에서 네덜란드가 승리하면서 네덜란드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든지 다 포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 또한 계속 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모여들었고, 종교의 자유를 찾던 기독교인들도 네덜란드로 오면서 네덜란드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가 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전 세계로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고, 이를 통해 유대인들도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영국 내전에서 승리한 올리버 크롬웰이 공화국을 설립하고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수용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옮겨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점점 부강해졌고, 17세기, 18세기에는 ‘대영 제국’을 건설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개신교인들은 해외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17세기 후반에 모라비아 형제단을 중심으로 해외 선교가 일어났고, 18세기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더 적극적인 해외 선교가 일어났습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은 유럽의 식민지에서 고통받는 개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각 개인이 복음을 듣고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일어난 선교 운동은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규모가 방대해 국가 단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세계 각 곳에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설교자들

1)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 - 윌리엄 캐리와 그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

윌리엄 캐리(1761~1834)는 영국의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구두 수선집에서 일을 배웠고,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그는 책을 통해 독학으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윌리엄 캐리(1761~1834)

 

그는 18살 때 거듭남을 경험했고, 22살 때는 성경을 읽다가 거듭난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침례교회에 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31살 때는 침례교 안에서 교파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예수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신 말씀을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 이해하여 대규모 선교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선교는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 민족 단위로 복음을 전해서 그 나라를 복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현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역자로 훈련해서 그들이 자기 나라에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792년에 최초로 해외 선교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윌리엄 캐리 스스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어 인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인도의 언어와 함께 힌두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도 문화를 존중했고, 다른 선교사들처럼 서구 문화를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799년에는 세람포라는 지역에 선교 기지를 만들었고 183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도 했는데, 인도에서 사용되는 6종류의 언어로 성경 전체를 번역했고, 성경의 일부라도 번역한 방언은 24종류나 되었습니다. 또 학교들을 만들어 많은 학생을 교육하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서 했던 선교 활동 방식은 개신교 내에서 매우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선교 방식은 영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도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리빙스턴은 선교를 위해 의학 공부를 했고, 28살이었던 1841년에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

 

허드슨 테일러(1832~1905) 역시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고 21살에 중국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지역에서 같이 활동했으나, 후에는 다른 백인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중국 내륙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중국 사람들처럼 옷을 입었고,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염색했으며,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어를 배우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도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1832~1905)

 

찰스 스펄전(1834~1892)은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스펄전의 집안은 대대로 청교도인이었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청교도 정신을 배웠고, 16살 때 거듭남을 경험한 이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7살 때는 공식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명받고 거듭났습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19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복음이 매우 활발하게 전해졌고, 정치인들 중에도 거듭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노예 제도를 폐지하자는 운동이 일어나 미국보다 36년이 앞선 1833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2) 미국의 대각성 운동 - D. L. 무디와 빌리 그레이엄

미국에서는 18세기에 조지 휫필드와 조너선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미 대륙으로 이주하여 동부에 정착해 있었는데, 인구가 계속 늘어나다 보니 서부로 이동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서부 개척 시대에 대각성 운동이 펼쳐져 미국 전역으로 기독교 신앙이 전해졌습니다.

 

미국 독립 혁명 이후에는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남북 전쟁 이후에는 3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대각성 운동은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3차 대각성 운동은 D. L. 무디(1837~1899)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무디는 당시에 활동했던 설교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다가 친척의 구두 가게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때 그는 일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를 약속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주일마다 교회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교회에 가면서 점차 구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18살 때 거듭남을 경험했습니다.

 

D. L. 무디(1837~1899)

 

이듬해에는 시카고로 이사를 했고, 그곳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학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디는 주말마다 길에 나가 학생들을 데려와 성경을 공부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16명 정도였던 주일 학교 학생의 수가 몇 년 후에는 1,500명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에는 폐병에 걸린 여교사 한 명이 그를 찾아와 죽기 전에 학생들의 집에 방문하고 싶으니 함께 가 달라고 청했습니다. 여교사는 무디와 함께 학생들의 집을 하나씩 방문하며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때 그 아이들이 모두 거듭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무디는 큰 감명을 받았고, 그 후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집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직접 설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1871년과 1872년에 영국으로 가서 전도집회를 열었을 때에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1873년부터 1875년까지 영국을 다니며 순회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 중에 성악가 데이비드 생키가 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디는 187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영국에서 있었던 소식을 전해 들은 교인들은 앞다투어 무디에게 설교를 청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대집회들이 열리게 되었고,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3차 대각성 운동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졌고, 무신론 사상과 사회주의가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또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때 미국 중심으로 일어난 복음 운동이 4차 대각성 운동입니다.

 

4차 대각성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빌리 그레이엄(1918~2018)입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에서 태어나 16살 때 거듭남을 경험하고 신학을 전공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8살 때 처음으로 전도집회를 진행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고 거듭났습니다.

 

빌리 그레이엄(1918~2018)

 

이 소식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전도집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185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전도집회를 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19세기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20세기에는 미국에서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고 있는 나라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이 사도들에게 국한된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에도 유럽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18세기에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선교단이 처음 유럽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고, 19세기에 윌리엄 캐리를 중심으로 교파를 넘어서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조직적인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서도 영국의 선교 방식대로 많은 선교 단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부흥회와 집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고, 거듭난 이들이 마음을 모아 세계를 향한 선교 활동을 지원하는 역사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은 기독교를 향한 박해가 별로 없습니다. 또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갈등도 크지 않습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박해를 받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은 무신론 사상과 개인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더욱 크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은 지난 어느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요한복음 15:15-20)

 

복음이 계속 이어지는 중에는 두 가지 모습이 항상 공존했습니다. 하나는 핍박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흘러 오는 가운데 항상 핍박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교회와 함께하시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이 핍박은 교회에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핍박받으셨고, 그것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에 그리스도인들도 힘을 얻고 핍박을 견딜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18-19)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제입니다. 우리는 교제를 통해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이 말씀을 들은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지금까지 복음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어지는 핍박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복음만 아니라 핍박도 말씀을 지키고 열매를 맺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역할을 주셔서 큰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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