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라 제국과 헬레니즘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앗수르는 남쪽 유다 왕국도 정복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결국 앗수르는 BC 605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 후 BC 586년에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나,
그로부터 70여 년 만인 바사의 고레스왕 때 선지자의 예언대로 자기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바사 제국은 BC 330년에 헬라 제국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인도까지 진출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를 확산시켰는데, 헬라에 이어서 이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도 헬레니즘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 헬라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가 헬라 전역을 점령하기 전, 헬라 지역에는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같은 여러 폴리스(도시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를 헬라 고전기라고 하는데, 그리스의 북쪽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 2세가
스파르타를 제외한 헬라 전역을 점령하면서 폴리스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필리포스 2세는 헬라 지역에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워서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대제국을 건설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위해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로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필리포스 2세가 BC 336년에 46세의 나이로 살해당하자
어려서부터 아버지 옆에서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알렉산드로스가
20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없지만, 시간대는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입니다.
BC 551년경에 기록된 다니엘서 8장에는
이미 2백여 년 후의 이 시대에 일어날 일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강가에 두 뿔 가진 숫양이 섰는데 그 두 뿔이 다 길어도
한 뿔은 다른 뿔보다도 길었고 그 긴 것은 나중에 난 것이더라 …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숫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
네가 본바 두 뿔 가진 숫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숫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 (다니엘 8:3, 5, 20-21)
이 기록은 메대 바사와 헬라 제국 사이에 있을 전쟁에 대한 예언으로,
헬라인들이 바사에 맞서 싸워 승리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계자들
BC 334년에 알렉산드로스는 바사를 향해 원정을 떠났고,
BC 333년 이수스 평지에서 있었던 바사와의 전투에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여
그 기세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패전한 바사 왕 다리오 3세는 알렉산드로스와 화해하여
포로로 잡힌 가족들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오 3세가 자신을 오리엔트의 왕으로 인정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다리오 3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진군하며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바사의 군대는 퇴각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말에 탄 알렉산드로스가 오른쪽에 있는 전차에 탄 다리오 3세와 싸우고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알렉산드로스 시대 헬라 제국 최대의 영토를 표시한 것입니다.
지중해 지역에는 이수스, 페니키아, 이스라엘, 이집트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레바논에 있는 페니키아(시돈, 베니게)의 도시들은 아무 저항 없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두로는 섬이라는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해 수 개월 동안 저항했습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둑을 쌓아서 섬과 육지를 연결해 두로로 진격했습니다.
결국 BC 332년에 해상 무역 도시였던 두로가 정복되면서
긴 세월 페니키아가 독점했던 지중해 해상 무역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남쪽으로 진군한 알렉산드로스는 큰 저항 없이 이집트까지 점령했습니다.
이집트는 당시 바사 제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자신들의 구원자로 여기고 환영했습니다.
이미 활발한 교류를 통해 헬라의 문화가 이집트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집트의 제사장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이집트의 신 아문의 아들이라 칭송하며 파라오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나일강의 서쪽 편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도시는 헬라 제국 시대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두로로 돌아와 시리아를 공격한 후 동쪽으로 전진했습니다.
BC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오 3세의 바사 군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했고,
결국 바사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3세는 도주했다가 1년 후에 살해당했습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까지 진출했고, BC 323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10년 동안
세계 최대의 영역을 정복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그는 오늘날의 인도에서부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스라엘,
이집트에서 터키, 그리스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 사후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에는 그의 죽음 후에 있을 일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이외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 (다니엘 11:4)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뉠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대로,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나라는
그의 사후에 네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각지에 총독으로 파견되어 있던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들은 자신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제국의 주인이 되고자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총 여섯 차례에 걸친 후계자들의 전쟁은 BC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끝이 났고,
헬라 제국은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의 네 나라로 나뉘었습니다.
이때 유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 또한 2백여 년 전, 선지자 다니엘이 계시를 받아 기록해 놓은 대로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분열된 왕국들은 알렉산드로스 시대와 같은 권세를 누리거나
넓은 영토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약 백 년이 지난 BC 198년경, 다니엘서에 북방 왕으로 기록된 셀레우코스 왕조와
남방 왕으로 기록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 전쟁에 패하면서 유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리아 전쟁에 대해
다니엘은 이와 같이 예언했습니다.
"남방의 왕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 …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그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넘어지리라
이에 북방 왕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취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다니엘 11:5, 13-15)
헬레니즘은 언어, 문화, 그리고 화폐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정복한 모든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져
로마 시대까지 전파되었습니다. 헬라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쇠퇴했지만 문화적인 요소들은 계속 보존되었고,
헬라어 또한 정복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계층이나 지식인들이 공용어로 사용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유대 땅을 지배하는 동안 헬레니즘은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때는 전반적으로 평화로웠고, 유대인들은 전통과 문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알렉산드리아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는데,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칠십인역」 성경 번역이라는 역사적 업적이 이루어진 곳도 이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은화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의 뿔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헬라의 신 제우스와 이집트의 아몬 신을 합쳐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로스가 헬라 지역뿐 아니라 이집트에서도 신격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은화는 알렉산드로스 죽음 후 리시마코스왕에 의해 발행되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유명세와 신격화된 이미지를 이용하여
자신이 정통 후계자임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왕들도 같은 방식으로 주화를 발행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직접 동전에 새기기도 했고,
여러 도시에 흉상을 세워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널리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물로 로제타 스톤이 있습니다. 1799년에 이집트의 도시 로제타에서 발견된 이 석비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BC 196년경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윗부분은 제사장들이 사용하던 신성 문자인 이집트 상형 문자, 가운데 부분은 지식층이 사용하던 이집트 민중 문자,
아래 부분은 그리스 통치자의 공식 언어인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석비에는 동일한 내용이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고대 그리스 문자는 해독이 가능했기 때문에
로제타 스톤은 고대 이집트어를 해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에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이 없었다면 고대 이집트 유물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아람어와 히브리어
「칠십인역」 성경은 히브리어-아람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가장 오래된 완전한 번역본입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언어인 헬라어로의 성경 번역은 BC 250년경 유대에서 초빙한 율법학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칠십인역」 성경은 유대교 성서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며,
신약성경에 사용된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약성경 인용구는 대부분 「칠십인역」
성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지만,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다니엘서와 에스라서에는 아람어로 기록된 내용이 있는데,
다니엘 선지자 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된 언어와 문자는 아람어였습니다.
다니엘도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구사했습니다.
당시 히브리어는 거의 유대인들만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 지역 외에 많은 지역에도 정착했지만 현지 사람들은 히브리어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다른 언어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아람어는 앗수르 시대부터 중근동의 일반적인 공용어였기에
당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는 열두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히브리어로, 2장부터 7장까지는 아람어로,
8장부터 12장까지는 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2장부터 7장까지는
세계 제국의 멸망에 대한 기록입니다.
특히 5장에는 벨사살의 잔치와 바벨론 제국의 멸망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1장과 8장부터 12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8장은 이스라엘의 성소에 대한 이야기로, 정한 때가 되었을 때의 일에 대한 예언입니다.
9장에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과 대환난 때에 대한 계시,
천사를 통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의 시기를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즉 이스라엘의 미래 역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인데 이러한 내용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방인은 이 내용을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 시대에 중동 전역에서 통용되는 국제적인 언어였던 아람어는
바사 제국에서 더욱 표준화되어 모든 국정에 사용되는 공식 언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도 히브리어보다 아람어가 더 지배적인 언어였습니다.
“제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라는 구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도 아람어였습니다.
&. 「칠십인역」 성경과 다니엘서의 기록
「칠십인역」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시기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분열된 헬라 제국 시대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BC 323년에 이집트를 점령하고 총독이 된 후
영향력을 견고히 다졌고,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왕조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이집트의 14명의 통치자는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집트의 황금 시대를 이루어 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나일강이었습니다.
나일강 삼각주 주변은 아무리 많은 인구가 정착한다 해도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비옥한 땅으로, 매우 풍요로웠습니다.
이집트는 나일강 주변에서 나는 풍부한 식량으로 사회 안정과 번영을 제공하며
문화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리아를 문화 진보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의술을 위한 최고의 대학과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철학자와 시인, 그리고 과학자들은 왕실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헬라인의 이러한 정치, 경제, 문화적 우월성은
그들의 영토 전체에 헬라 문화권을 확립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헬라어는 빠르게 퍼져 나갔고, 당시 세계의 지배적인 언어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헬라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황금기를 맞이하는 동안
구약성경의 「칠십인역」이 번역되었습니다.
「칠십인역」 성경이 번역된 때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통치 시기입니다.
그는 BC 282년부터 24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도서관에 모든 종교의 지혜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해서 갖추어 놓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아테네 사람 데메트리오스가 왕에게
도서관의 장서 목록에 유대의 율법을 추가하자는 조언을 했고,
왕은 유대 학자에게, 구약성경을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이미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의식이나 일상생활에서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이 종교와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 성경 번역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헬라어 성경 번역을 완성하기 위해, 유대의 열두 지파 가운데 여섯 명씩 선발된
72명의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은 그들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모세오경을 번역했는데,
학자들은 한 단어 한 단어를 번역했으며 모든 번역가가 모든 구절을 번역했습니다.
모두가 이 번역에 동의했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모세오경의 번역은 72일 만에 완성되었고 그 밖의 성경 번역은
AD 100년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이 번역됨으로 인해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구약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오경의 율법들은 당시 학자들에게 철학적, 윤리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헬라어는 라틴어 다음가는 공식 언어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헬라의 언어와 문화가 지배적이었으므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헬라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전도 여행을 다니던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들도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 셀레우코스 왕국과 하스몬 왕조
BC 198년경,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의 전쟁에서 이긴 셀레우코스는
유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셀레우코스의 왕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를 존중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BC 175년에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유대 땅에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굉장히 존경했고,
자신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라는 것과 헬라 문명에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헬라 문화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대 땅에서 제사장 직분을 사고팔 수 있게 함으로써 유대 경건주의자들의 큰 반발을 샀고,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지나면서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BC 168년경에 다시 이집트를 공격하러 떠나고,
이집트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로마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물러나면서
그 분풀이로 예루살렘의 정통파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그
들이 가지고 있던 직책과 성전을 친헬라파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또한 제사장 직분을 매매하게 함으로써 세속화 된
사두개인들이 권력을 탐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금지하고 돼지와 같은 부정한 짐승으로 제물을 드리게 했습니다.
성전에는 제우스신의 신상들도 세웠습니다. 할례까지도 금지했는데,
할례를 행한 부모와 아기를 모두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다니엘서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북방 왕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리며 임의로 행하고 본토로 돌아갈 것이며
작정 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다니엘 11:28-30)
거룩한 언약을 거스르고 임의로 행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약탈했다는 것이고,
작정된 기한은 2년 후를 말합니다. 깃딤은 키프로스 섬의 옛 지명입니다.
다니엘은 로마가 다스리던 이 지역에 군사들이 와서 북방 왕을 막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이 일로 인해 화가 난 북방 왕 에피파네스는 돌아가는 길에
율법을 배반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다니엘 11:31-32)
그의 군대가 성전을 어떻게 더럽힐 것인지가 자세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용맹을 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BC 167년경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봉기한 제사장 집안이 있었습니다. 맛다디아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와 다섯 아들은 하시딤이라는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무력으로 맞섰습니다.
그 후 BC 164년에 맛다디아의 아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을 행했던 이들을 쫓아내고 율법대로 정확하게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날을 수전절이라는 절기로 삼아 매년 기념했습니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리시아스 장군을 보내 협상을 요청했습니다.
종교적인 부분은 간섭하지 않을 테니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경건주의자들은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지만,
마카비 집안 사람들은 끝까지 싸워서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카비 가문에서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 가다가 BC 142년에 마카비의 형제 중 하나였던
시몬이 셀레우코스의 왕 데메트리우스 2세와 협상하여 독립 왕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후 왕위를 이어받은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 1세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BC 125년경에 이두매 사람들이 살고 있던 남쪽 지방을 정복하고 이두매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키기도 했는데, 이때 강제 개종을 당한 사람들 중에 헤롯 집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자신이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경건주의자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사두개인들을 앉혀서 사두개인들이 다시 정치에 발을 담그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쫓겨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훗날 바리새파가 되었고,
이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힐카누스 1세 사후 그의 장남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통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 알렉산드라 살로메는 남편의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하여
그를 왕위에 올렸습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을 학살했고,
이는 그에게서 민심이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알렉산더 얀네우스도 세상을 떠나자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직접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을 다시 정치에 다수 등용시켰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의 정치 싸움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라 살로메 사후 그 아들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왕권을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두매인들과 바리새파는 요한 힐카누스 2세를, 사두개파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지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양쪽이 다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결국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정복함으로써
하스몬 왕조의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조에 속한 영토를 모두 독립시켰고 요한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앉히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로마로 데려갔습니다. 요한 힐카누스 2세는 로마 황제에게 자신을 지지했던
이두매인 헤롯 안티파터를 유대 땅의 행정관으로 임명할 것을 청했는데, 그가 바로 헤롯 대왕의 아버지입니다.
&. 헬레니즘과 그 영향
헬라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BC 31년 로마에게 패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로마 제국 시대가 이어지고,
그 시대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약성경이 기록된 때 역시 로마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10장 3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세상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어 말하면서, 첫 번째가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을 말합니다. 그다음이 헬라인인데,
이는 이방인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로마서 2:9-10)
로마 제국 시대에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헬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 제국은 멸망했지만 헬라의 사상과 철학, 언어나 학문은 로마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헬라를 정복했지만
문화나 사상적으로는 헬라가 로마를 정복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단순히 정치적으로 통일된 제국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문화나 사상적으로도 통일된 왕국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지역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는데, 헬라 제국 영토 내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가 약 70여 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헬라식 도시에는 헬라식의 신전과 원형 극장, 학교인 김나시온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헬라 사람들을 다른 여러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가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들이 그곳에서 이민족들과 결혼함으로써 헬라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퍼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당시 이민족들은 헬라의 문화를 차츰 받아들였고, 헬라 문화는
이민족들의 토착 문화와 융합되어 그 땅에 뿌리내렸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 광대한 헬라 제국에 헬라 문화가 퍼지게 되었고
그것이 로마 시대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왕들도 헬라식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대표적인 도시로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등장하는 안디옥과 실루기아가 있습니다.
이 도시를 세운 사람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첫 번째 왕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입니다.
그는 지중해 연안에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실루기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약 1년 후에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안디옥은 수리아 지역에서 크게 번영했고, 로마 제국 시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사도 바울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헬라는 철학이 크게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있었고, 이러한 철학자들은 후에 학파를 형성했습니다.
그중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 학파이고,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 학파인데, 이러한 학파는 헬라 시대를 넘어서 로마 시대에까지 이르렀고
로마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학파들의 이름은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사도행전 17:16-18)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과 쟁론했습니다.
이들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헬라의 철학은 로마 제국 시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헬라는 자연 과학 분야에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도서관이 있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와 같은 곳이었고,
이곳에서 자연 과학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라고 외쳤던 아르키메데스나 기하학의 체계를 세운
유클리드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학문이 많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사도행전 18:24)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라는 사람은 후에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 학문이 많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이 영어 성경에는 웅변을 잘한다, 언변이 좋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로 토론하고 웅변하면서 배워 가는 그리스의 교육 방식을 생각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의 신들도 로마 제국 시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사도행전 19장에는
헬라 신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에베소는 아덴이나 고린도와 멀지 않아서 오래전부터 헬라의 영향을 받고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던 도시입니다.
"그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 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 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사도행전 19:23-29, 35)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핍박했습니다.
이 내용 가운데 등장하는 아데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테미스 여신이고, 쓰스는 제우스를 의미합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그리스의 우상들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화 되어 헬라인으로 살아가던 이방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거듭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2-6)
이때 이들은 “세상 풍속” 곧 헬라의 문화와 사상, 헬라의 철학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서 살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는 영광스러운 위치가 되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받은 골로새 지역 역시 헬라 문화권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 “세상의 초등 학문” 역시 헬라의 학문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경고를 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3-5)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그들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헬라 제국 시대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경영하시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를 준비하셨고,
예수님 이후에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헬라어가 공용어로 되어 있던 이 시기에 사람들이 구약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 제국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경영하시며 예수님이 오실 때를 하나하나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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