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제국과 예수 그리스도
로마 제국 시대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 부활하심이 모두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전도 여정 속에는 로마 제국 시대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대의 로마는 매우 평화로웠습니다.
이 시대를 ‘로마의 평화’라는 뜻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BC 1세기 말에 황제 자리에 오른 아우구스투스 때로부터
약 2백 년 동안 큰 전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제국이 안정되었고,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통과 통신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요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의 모습과 박해로 인해 굉장히 많은 훈련을 받던 교회의 모습이 대비되기도 합니다.
&. 예수님의 탄생과 가이사 아구스도
성경을 통해 예수님 탄생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누가복음 2:1-2)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고 했습니다.
인구 조사를 하던 무렵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 구레뇨가 수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있을 때 첫 번째로 한 인구 조사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구 조사가 이후에도 몇 번 더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누가복음 2:3-5)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은 이스라엘 북쪽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 때문에 남쪽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미가서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가서5:2)
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의 가이사 아구스도는 옥타비아누스라고도 불렸던 인물로, 로마 원로원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BC 27년부터 AD 14년까지 로마의 초대 황제로 재위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자신이 남긴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자기가 다스리는 영토 곳곳에 남겨 놓았는데,
이를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이라고 합니다.
지금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의 전문이 담긴 비석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박물관에는 각지에 남은 파편들을 모아 만든 복원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비문에는 BC 8년경에 집정관급의 절대 명령권을 통해 호구 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통해 로마 시민의 숫자는 423만 3천 명으로 파악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인구 조사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식민지에 있는 인구 숫자를 파악하면
세금을 그만큼 정확하게 걷을 수 있고, 세수를 예측하면 재정을 계획하기가 쉽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인구를 조사했습니다.
이때 남자는 14세부터 65세까지, 여자는 12세부터 65세까지 매년 그 숫자를 조사하여
그 사람 수대로 세금을 거두었다는 것이 실제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가이사 아구스도가 BC 8년경에 호적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헤롯은 BC 4년경에 죽었으니, 그 사이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 로마 제국 초기의 황제들
로마는 BC 27년경에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제국을 이루기까지
약 5백 년간 공화정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BC 509년경에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로 시작된
로마는 4~5백 년 후 지중해 연안을 따라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네 나라로 나뉘게 되는데, 그중 두 나라는 북방과 남방의
두 나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북방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 남방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64년경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0년경에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유대 땅의 하스몬 왕조도 BC 63년경에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로마가 공화정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 로마에는 지금의 국회와 같은 역할을 했던 원로원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에서 선출된 집정관이 로마를 다스렸는데, 이렇게 선출된 집정관은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로 1년 임기의
집정관을 두 명 선출하여 한 달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집정관을 지낸 사람들은 임기가 끝난 후 속주에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카이사르로 인해 무너졌습니다.
카이사르는 훗날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아버지입니다.
BC 60년경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비공식적인 협약을 맺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집정관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을 1차 삼두 정치라고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BC 64년에 북방 왕 셀레우코스 왕조를 정복한 장군이었습니다.
또 BC 63년경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그로 인해 하스몬 왕조가 막을 내렸으며 유대 땅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 성전의 일부를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부유했고 영향력이 컸던 크라수스가 죽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경쟁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로마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BC 48년경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 패배하여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을 갔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후 알렉산드리아로 간 카이사르는
그곳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로마에서 가장 큰 권력을 잡게 된 카이사르는 BC 48년경에 종신 독재관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 체제를 유지하다가 국가에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한 사람의 독재관을 뽑아 다스리게 했는데,
그 독재관의 임기는 본래 6개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는 것은,
그때부터 황제와 같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이사르는 BC 47년경에 헤롯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터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그를 유대 땅의 행정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카이사르는 BC 44년에 일인 독재 체제를 반대했던 정적들에 의해 암살을 당했습니다.
카이사르에게는 본처를 통해 얻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양아들로 삼고
후계자로 정한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라는 청년이 카이사르의 막대한 재산과
군대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카이사르의 부하 장군이며 영향력이 컸던 정치가이자 군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역시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레피두스까지 세 사람이 협약하여 정치를 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2차 삼두 정치라 합니다.
이때 이 세 사람은 집정관뿐만 아니라 호민관과 원로원의 업무까지 실행하는
그야말로 견제가 불가능한 최고의 통치 체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했습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승전을 기념하고자 그가 진을 쳤던 악티움 북쪽 지역에 도시를 세우고,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니코폴리스(Nicopoli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니코폴리스는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하면서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딛 3:12) 라고 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패전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고,
BC 30년경에 두 사람 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로 인해 남방 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막을 내렸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에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자기 양아버지였던 카이사르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원로원을 인정하며
명목상으로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1인자로서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BC 29년에 로마 원로원에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제1인 시민’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그를 로마의 최고 책임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BC 27년에는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올렸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로마의 두 번째 황제 티베리우스는 AD 14년부터 37년경까지 재위했습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던 때가 바로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입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빌라도를 총독으로 파견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누가복음 3장 1절에 디베료 가이사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세 번째 황제 칼리굴라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고, 성경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황제는 AD 41년 부터 54년까지 재위했던 클라우디우스로 성경에는
글라우디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황제로 있던 중, AD 45년부터 약 3년간 로마 제국에
아주 큰 흉년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흉년으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도 바울 편에 보냈다는 내용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11:27-30 )
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AD 49년경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추방했습니다.
카이사르 때부터 클라우디우스 시대까지 로마인들은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는데,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싸움이 여러 번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입니다.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행전 18:1-3)
로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고린도로 많이 이주해 갔는데,
이때 고린도에 있던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쫓겨 나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후에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을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은 모두 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다섯 번째 황제는 AD 54년부터 68년까지 통치했던 네로 황제입니다.
AD 64년경 로마 시내에 대화재가 일어났는데, 황제가 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도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네로 황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AD 68년은 한 해에 황제가 세 번이나 바뀌었던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후에 황제가 된 사람이 아홉 번째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입니다.
네로 황제 때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장군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의 명에 따라 그 반란을 진압하러
장남 티투스와 함께 유대로 갔습니다. 그가 유대에 있는 동안 로마에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었고,
결국 그가 AD 69년에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땅을 떠나 로마로 간 후, 총사령관이 된 티투스는
AD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 불을 질러 성전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예수께서 생전에 성전을 보시고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 24:2)
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로마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그 모습은 훗날 황제 자리에 오른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세운
티투스 개선문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개선문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어 로마 군인들이
성전의 기물들을 메고 오는 모습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그는 로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큰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을 건축했는데
이 일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노예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AD 79년에 세상을 떠나자 티투스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고, 페스트가 창궐했습니다.
티투스는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까지 3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이러한 재앙들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되새겨 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헤롯
신약성경에는 여러 사람의 헤롯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헤롯 대왕의 자손들로
유대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헤롯은 안티파터 2세의 아들입니다.
그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었을 때
놀라서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아버지인
안티파터 2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티파터 2세는 하스몬 왕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라 살로메 사후에
그의 아들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왕권을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때 이두매인 안티파터 2세가 요한 힐카누스 2세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조의 영토를 모두 독립시켰고, 요한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앉히며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로마로 데려갔습니다. 요한 힐카누스 2세는 로마 황제에게 자신을 지지했던
이두매인 안티파터 2세를 유대 땅의 행정관으로 임명할 것을 청했고, 로마는 로마 제국에 충성하는
안티파터 2세를 신임해, 후에 그의 아들이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안티파터 2세의 아들 헤롯은 이두매인으로서 요한 힐카누스 2세의 외손녀인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네와 결혼했고, 유대를 통치하면서 성전도 건축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스룹바벨 시대에 지은 성전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훼손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을 헤롯이 수리하고 증축했는데,
그 성전이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요 2:20) 이라고 말한
예수님 당시의 성전입니다.
헤롯은 그 밖에도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습니다. 마사다라고 하는 천연의 요새를 세우고
그 북쪽의 헤로디움, 여리고와 사마리아 세바스테에서도 건축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헤롯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가이사랴 마리티마를 그리스식 항구 도시로 세워
로마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나타냈습니다.
헤롯 사후에는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통치할 때 가이사랴에 주로 머물렀고,
이곳은 행정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백부장 고넬료가 바로 가이사랴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그리스식 원형 극장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헤롯은 민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두매인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헤롯은 항상 반역을 두려워했고, 심지어 아내와 아들들을 반역죄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갑자기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 대해 물으니
헤롯은 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수많은 아이들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세 아들이 이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왕위는 아켈라오에게 물려주어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하게 했고,
안디바에게는 갈릴리와 페레아, 빌립에게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물려주었습니다.
유대를 다스린 아켈라오에 대한 내용은 마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애굽에 가 계셨을 때, 헤롯이 죽었지만
아켈라오가 유대를 다스리게 된 것을 두려워한 요셉이
그를 피해 갈릴리에 가서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마19-23절 참조)
아켈라오는 약 10년간 유대를 다스렸으나 폭정으로 인해 로마에 의해서 쫓겨났고
그 후로는 로마 총독이 유대 지역을 직접 통치했습니다. 빌라도는 그 총독들 중 한 명입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누가복음 3장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1-2절)
AD 28년, 29년경인 이때,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었고,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
그 동생 헤롯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빌립(1)’은 ‘헤롯 빌립(2)’과는 다른 사람으로, 헤로디아의 남편입니다.
후에 헤롯 안디바가 헤로디아를 취했는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지적하자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예수께서 붙잡히셨습니다.
이때 헤롯 안디바는 궁금해 했던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누가복음 23:6-7)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갈릴리를 통치하는 헤롯 안디바에게 가서
재판을 받으라며 예수님을 갈릴리로 보냈습니다.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누가복음 23:11-12)
이때 헤롯 안디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고는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이방인 빌라도와 에돔 자손 헤롯,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그리고 이어서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네의 자손으로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정통 유대인들과 손을 잡고 정통 유대교 정치를 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정책은 사도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사도행전 12:1-3)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 12:23-24) 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핍박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계속 전파되었습니다.
초록색 영역은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통치했던 지역이고,
굵은 선으로 표시된 지역은 헤롯 아그립바 2세가 통치한 지역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지 못했고,
이 지역은 또다시 총독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 당시 총독으로 성경에 벨릭스와 베스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 마리티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록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사도행전 24:24)
벨릭스 총독의 아내는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인 드루실라였습니다.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사도행전 24:27)
2년 후에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AD 60년경의 일입니다.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사도행전 25:13-14)
베스도가 유대의 총독이 되어 가이사랴에 있을 때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누이 버니게와 함께 베스도를 찾아왔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사도 바울에 대해 설명하고는 함께 사도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사도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2세와 유다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 어떻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 담대하게 설명했습니다.
&.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예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던 사도 바울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전도의 여정을 이어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정의 끝에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을 직접 이끄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사도행전 23:11)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로 끌려가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제국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선지자들은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실 하나님을 계속 증거했습니다.
역사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역사를 경영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 시대에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고,
승천하신 이후 성령이 내림으로써 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교회 시대의 일원들을 만들어 가는 그 대장정에 참여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
각 제국의 역사를 이끄셨던 하나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사도 바울을 이끌었던 성령의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세상의 치리자들은 자기 욕심대로 권력을 사용했지만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1)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3-10)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예정하셨던 교회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서 역사를 펼쳐 가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그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때가 차서 오신 예수께서는 그 피로 대가를 지불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을 얻게 하는,
즉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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