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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교회사 1(초기 교회의 박해)

by 우연!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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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교회와 박해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회가 할 일을 일러 주시면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후 복음의 역사는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 시대의 배경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성령이 내리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는데,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 각지로 도로가 깔리면서

교통이 크게 발달하여 군대의 이동과 물자 교역, 세금 징수가 편리하게 되는 한편

사람들 간의 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또 로마 제국에 큰 영향을 미친 헬라 문화가

제국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는데,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성경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시대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성경을 볼 수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은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기는 로마의 강력한 통치 체제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핍박이 가해졌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로마제국 초기의 황제들

 

이 무렵의 로마 황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때 예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디베료라고 기록된 티베리우스는 2대 황제입니다.

또 사도행전 18장에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추방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대 황제 티투스는 황제가 되기 전, 장군으로 있을 때인 AD 70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해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각 지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각각 자기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을 듣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거듭난 이들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라고 하신 대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행 7장 참조)

스데반의 죽음은 유대인들이 성령의 축복을 거부하고 불순종한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예루살렘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피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행 8:26-9:19 참조)

그리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성령이 내리고,

이방인들이 거듭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행 10장 참조)

 

그 무렵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견했습니다.

그 후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왔고, 사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을 거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따로 세워서 두 사람에게 복음의 사역을 맡기셨고,

이들은 성령의 보내심에 따라 실루기아로 내려갔다가 구브로섬의 살라미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곳에서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고, 그 후로 그는 바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전도 여정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들을 핍박하자

바나바와 바울은 유대인들을 피해 이고니온으로 가서 은혜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이들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이 있어 루스드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돌로 쳤고,

바울은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힘을 입고 다시 일어나 더베로 갔고,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마음을 굳게 한 후에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전도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두 번째 전도 여정을 떠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안디옥의 이방인 형제들에게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큰 다툼과 논쟁이 일어나자 바나바와 바울이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 형제들이 의논하고 결정한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멀리해야 할 것 네 가지가 결정되었는데,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형제자매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교제 가운데에서 내려진 결론이었습니다. (1-29절 참조)

 

그 후 바울은 2차 전도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를 두고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갈라섰고 실라와 함께 더베와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나 함께 전도 여정을 떠났습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여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갔습니다. 처음 간 곳이 빌립보인데, 그곳에서 루디아를 만나 그 집에 복음을 전했고, 데살로니가로 가서 3주 동안 유대인 회당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핍박하기 시작하자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갔습니다. 그곳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헬라 철학자들과 쟁론했고, 복음을 전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고린도로 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고, 이들과 함께 1년 6개월을 머무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행 18장 참조)

 

바울의 세 번째 전도 여정

 

그 후 바울은 세 번째 전도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차례로 다녀간 후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갔고,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세 달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으나 복음 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핍박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있는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2년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는 많은 이적들과 함께 복음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자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장인들이 생계의 위협을 느껴 큰 소요를 일으켰고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전도했던 지역들을 다시 다니며 교회들을 굳게 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많은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죽을 것까지 각오했노라고 하며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형제들의 영접을 받고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장로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방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고했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변론도 하고, 아그립바왕 앞에서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해서 바울은 결국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는 풍랑을 만나 멜리데섬에 표류해 있으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로마로 이송된 후에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8장까지의 기록입니다.

 

바울의 로마행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65년경에, 바울이 64년에서 68년 사이에 순교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했고, 그후 100년경에 사도 요한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 예루살렘 멸망 이후부터 300년까지 교회 안에 나타난 문제들

이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들이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큰 문제는 교회 안에서부터 생겨났습니다. 성경과 다른 가르침들이 등장하고 감독이나 성직 제도가 강화됨으로써 교회가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1) 성경과 다른 교리들

성경과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사도 시대 때부터 계속 있어 왔습니다. 사도들은 분명히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전했음에도 율법을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믿음으로서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는 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70년 이후 300년까지의 시기에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영적이고 특별한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주장을 ‘영지주의(Gnosis, 靈知主義)’라고 하는데, 이들은 세상에 있는 것을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만 구분하여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은 모두 악하고, 영적인 것만이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뒤에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께서는 유령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것도 실제가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고,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받는 것을 직접 보고 증거했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과, 그러한 것들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이라는 점을 분명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4:2-3 참조)

 

영지주의적인 종교 중 하나는 마니교입니다. 마니교는 고대 페르시아 왕국의 바벨론에서 태어난 마니라는 사람이 창시했는데, 여러 종교의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어 기독교 역사에 대표적인 이단 사상으로 정죄된 종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마니교가 전파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후의 역사를 보면 참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할 때, 그들에게 마니교도라고 오명을 씌우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2) 성직 제도와 감독 제도의 심화

사도행전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서들을 읽어 보면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성직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직분을 주셨고,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그 머리의 명령대로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성경과 다른 교리들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교회에 갈등이 생겨 교회가 분열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감독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그나티우스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베드로나 요한을 직접 대면했던 인물로, 70년부터 107년까지 약 37년간 안디옥에서 직분을 맡아 행하다가 108년에 트라야누스 황제 때 순교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단의 사상이나 잘못된 교리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한 명의 감독이 한 지역을 지도, 감독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사도행전 20장 내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린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 장로들을 불러,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8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감독자는 그가 부른 교회의 장로들을 의미하지만, 이그나티우스는 이들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이해했고, 이 구절을 근거로 각 지역마다 감독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감독이 없다면 침례나 성찬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나, 감독 제도가 강화되면서 점점 성령의 이끄심이 아닌, 사람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감독 제도가 강화됨으로 인해 생겨난 가장 큰 문제는 감독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2세기 초반에는 성직자가 주관하는 침례나 성찬과 같은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교리가 확산되었고, 2세기 말에는 감독이 유아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성찬도 성직자들이 주관하는 신비스러운 의식으로 여겨져 이후에는 성직자가 주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과 같은 교리를 낳게 되었습니다. 성직 제도가 강화되다 보니 후에는 감독에게 죄를 사하는 권위가 있다는 교리까지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라고, 중보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3) 성경과 철학 사상의 융합

로마는 기본적으로 헬라의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오리게네스입니다. 그는 겸손하고 금욕주의적인 신앙인으로서 당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영원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진정한 교회’라고 했던 그는 구약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당시에 있었던 여섯 개의 구약성경 번역본을 한데 모아서 구약 대조 성경인 헥사플라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헥사플라

 

오리게네스는 헬라 사상에 젖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헬라 사상과 성경을 융합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의미가 있고, 숨어 있는 영적인, 비유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내용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 중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고 헬라 사상과 이단의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으로 비유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유 해석법은 오리게네스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복음과는 다른 내용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리게네스도 영적인 것을 중요시하다 보니 사탄을 비롯한 모든 영들이 언젠가 다 회복될 것이라는 회복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옥의 형벌은 영원하다고 한 성경의 기록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따라서 훗날 이러한 사상들은 교회 공의회에서 잘못된 사상으로 정죄를 받기도 했습니다.

&. 초대 교회 시대 복음의 역사

 

1) 신약성경 27권의 완성

로마 제국 안에서 복음은 널리 퍼져 AD 300년경에는 기독교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마다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 기록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나고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그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많은 혼란을 일으켰기에 신약성경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나 복음서와 같이 교회 안에서 인정된 책들을 모아 성경으로 엮게 되었습니다.

 

AD 1~3세기 기독교의 전파

 

성경을 영어로 ‘바이블(Bible)’, 독일어로 ‘비벨(Die Bibel)’, 프랑스어로는 ‘비블(La Bibl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헬라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책 또는 두루마리를 뜻하는 ‘비블로스(biblos)’의 복수형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여러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성경, 곧 정경(正經)에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경은 그리스어의 카논에서 유래한 말로, ‘재는 막대기’ 혹은 ‘척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잣대로 크기를 재듯이 교회 안에서 판단할 때 성경 말씀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활동과 복음의 사역을 기록했다는 표현이 있고 (1:1-2 참조), 사도 시대에는 여러 사람들이 서신서를 남겼습니다. 그러한 많은 기록들 중에서 정경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했는데, 그중 첫 번째 기준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기록되었는가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라면,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구약을 완성시키신 내용을 담아 증거한 책이 바로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기록한 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표현되어 있느냐가 중요한데,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1-12)라고 했습니다.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는지도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문서의 내용이 성경으로서 합당한지를 살폈고,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그 문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지의 여부를 따졌습니다. 즉 당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보고 듣고 읽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는지의 여부도 정경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골로새서 4:16)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18절) 라고 했는데, 이로 미루어 이 글이 바울이 직접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는 모든 글을 필사로 복사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글을 보낼 때는 원본을 두고 필사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이런 책들이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딤후 4:13) 라고 했습니다. 당시 책이나 글을 쓸 때 사용한 가죽 종이는 양피지를 의미합니다.

 

양피지에 쓴 성경

 

위 사진의 양피지는 BC 300년경부터 AD 100년 사이에 구약성경을 필사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일명

‘사해 사본’ 중 하나입니다. 신약성경도 이와 마찬가지로 가죽 종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2세기로 넘어가면서 많은 교회에서는 이러한 서신서나 복음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성경으로 모아서 읽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로는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무라토리라는 사람이 1740년경에 신약성경 목록을 출판했는데, AD 190년경에 기록된 성경들을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목록을 보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과 대부분이 일치합니다. 일부는 초대 교회 시대에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책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했기에 결국 정경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AD 367년경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던 아타나시우스가 쓴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신약성경의 정경 목록이 나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 27권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리고 AD 397년경에 카르타고에서 열렸던 공회에서 신약성경 27권을 정경 목록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이 카르타고 공회에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신약성경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교회 전체의 거듭난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신약성경 27권이 선정된 것은 카르타고에 모였던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핍박

초대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 사마리아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마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네로가 황제였던 AD 64년경에 로마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많은 부분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때 네로가 방화를 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이로 인해 반란의 조짐까지 보이자 네로 황제는 자신에게 오는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화재의 원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로부터 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불에 태워지기도 했는데, 그 원형 경기장(콜로세움)이 지금도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콜로세움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숨었습니다. 카타콤은 지하 묘지를 말합니다. 로마는 땅이 석회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땅을 파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은 로마시 바깥에 땅을 터널처럼 파고 벽에 시신을 넣어둘 수 있는 칸을 만들었는데, 이 터널들을 연결하면 20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런 카타콤이 로마시 외곽에 굉장히 많았습니다.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구조가 복잡한 카타콤으로 숨어들었고, 그 안에서 살면서 예배도 보고 복음도 전했습니다. 그 활동의 흔적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카타콤

 

AD 64년경에 네로 황제로 인해 시작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은 처음에는 로마시 안으로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 황제들이 제위를 이어 가면서 점차 로마 제국 전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잡히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어려운 환경에 있으면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서머나 교회의 폴리카르포스 (폴리캅)가 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156년경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서머나의 총독이 폴리카르포스에게 예수를 욕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폴리카르포스는 ‘지금까지 86년 동안 나는 주님을 섬겨 왔다. 그동안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나쁘게 대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나의 왕, 나를 구원하신 분을 어떻게 욕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대답하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또 AD 166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난은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에게 구원과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 모세를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라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 앞에 갔을 때 받을 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박해와 핍박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적이나 언어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적으로 결정된 곳에서 살고

그 지방의 의복이나 음식, 일반적인 행동 양식을 따르면서도

놀랍고도 명백한 충격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 주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순례자의 모습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한 시민으로서 다른 이들과 같이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마치 나그네처럼

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외국 땅이 자신들의 조국 같고,

자신들이 태어난 곳이 외국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제정된 법에 복종하나 동시에

그들의 삶은 그들의 그 법을 능가한다.

 

그들은 욕을 먹어도 축복하는 자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이름도 없이 남겨 놓은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가

우리와 전혀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그 약속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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