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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성경속 이야기2(사마리아와 앗수르 제국)

by 우연! 202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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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와 앗수르 제국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애굽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그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넓은 땅을 차지해서 통치했던 솔로몬왕 이후

나라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그의 뒤를 이은 모든 왕들도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결국 북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경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마리아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갔고,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셨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사마리아의 역사, 예수님이 오셔서 사마리아에서 보이셨던 행보,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역사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BC 2천년경에 나라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성경에는 앗수르인의 조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창10:1, 22)

셈의 후손들은 아라비아반도의 북쪽,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에 살았고,

이 지역에서 최초의 앗수르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앗수르 제국의 시작은 기원전 10세기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되었고,

앗수르인들은 주변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는 동쪽으로 오늘날의 이란, 서쪽으로 지중해,

그리고 이집트 경계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당시 주요 성읍으로는 아슈르, 성경에 갈라라고 기록된 님루드 (창 10:11 ), 니느웨가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최대 영토

 

BC 800년 이후의 이스라엘과 앗수르

 

앗수르의 왕들 중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들이 있습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성경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첫 번째 앗수르 왕입니다. (왕하15:19 )

이 시기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왕국은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왕이,

유다 왕국은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왕국은 디글랏 빌레셀 3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에 의해 포위되어 (왕하 17:3 ) 결국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호세아 구 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왕하 17:6)

 

이렇게 북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앗수르는 다음 왕 산헤립 때 남쪽의 유다를 침공했으나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왕하 19:35-36)

앗수르는 에살핫돈 때에 이집트 경계까지 정복했고, 아슈르바니팔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아슈르바니팔 이후 쇠약해지자 바벨론이 재기하면서 앗수르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 고대 앗수르라는 나라는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잊혀진 상태였습니다.

앗수르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조차 의심해서 전설 속의 나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842년에 앗수르의 유적을 찾던 프랑스인 폴 에밀 보타에 의해

코르사바드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코르사바드의 성벽, 그리고 비석에 새겨진 문자들은

그것이 앗수르 시대에 기록된 것이 분명함을 증명했고,

그렇게 앗수르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폴 에밀 보타의 코르사바드 유적 발굴 현장

 

1845년에는 영국의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님루드와 니느웨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 니다. 앗수르 제국이 실재했으며

또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많은 이들이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의 님루드 유적 발굴 삽화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의 니느웨 유적 발굴 삽화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는 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도 발굴했습니다. 여기에는 앗수르에 복속된

다른 나라의 왕들이 살만에셀에게 굴복하고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왕이 살만에셀 발밑에 엎드려 있는 모습에 쐐기 문자로 ‘오므리의 집의 예후의 조공.

나는 은, 금, 금 그릇, 뚜껑 달린 금 화병, 금 컵, 금 바구니, 주석, 시종, 창을 받았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 예후의 이름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석비는 이스라엘 사람이 묘사된 가장 오래된 유물이기도 합니다.

 

블랙 오벨리스크 BC 825 살만에셀 3세에게 굴복하고 조공을 바치는 북이스라엘 왕 예후의 모습이 묘사된 석비

 

 

살만에셀 3세는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825년에 제작된 살만에셀 3세의 기념비에

북이스라엘 왕 예후가 그의 발밑에 엎드린 장면과 함께

예후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BC 722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앗수르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던 관계였음을 나타냅니다.

 

앗수르인들은 칼이나 투구, 방패 등의 무기를 다량으로 만들 수 있는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동으로 만든 무기에 비해

앗수르의 철제 무기는 훨씬 강력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적지를 공격할 때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대고 공성퇴를 올려 성벽을 공략하는 등 새로운 작전들을 펼쳤습니다.

BC 858년에서 824년경에 만들어진 앗수르의 발라왓성의 문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띠가 있는데,

이 청동 띠에는 공성퇴와 함께 성읍을 공격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발라왓 문 BC 858-824 살만에셀 3세의 발라왓 문에 둘러져 있던 청동 띠(좌) 나무 부분이 분해되고 남은 청동 띠로 복원한 실물 크기(높이 6.8m 추정) 복제품(우)

 

발라왓 문의 세부 앗수르 군이 공성퇴로 성을 공격하는 모습

 

앗수르 특유의 잔인함이 자세하게 표현된 이 유물은 앗수르인들이 왕의 권세를 어떻게 과시했는지

잘 나타내는 한 예입니다. 그들은 성문에 군사 작전과 잔혹한 행위를 자세히 묘사해

궁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짐작하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앗수르 군사들은 군사력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뛰어났지만 잔인하기로도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런 앗수르 군사들의 무자비함은 여러 유적들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스다롯성 전승 기념 부조에는 북이스라엘의 길르앗 북쪽 지방에 위치했던

아스다롯성이 함락된 후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스다롯성은 BC 733년에 함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조 하단에는 전차를 타고 개선하는 디글랏 빌레셀 3세의 모습이 있고,

상단에는 포로가 된 백성들과 전리품으로 취한 가축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고

그곳에 또 다른 민족을 이주시키는 강제 이주 및 혼혈 정책을 펴서 피정복민을 통치했습니다.

또 강제로 이주시킬 때 귀족들이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철저히 분리해 잡아갔습니다.

한 지역에 둘 이상의 민족이 함께 살도록 함으로써 각 민족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약화시켜

반란의 가능성을 낮추어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한 것입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아스다롯성 전승 기념 부조 BC 733-732

 

이러한 앗수르의 강제 이주 정책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고,

사마리아 지역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 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왕하 15:29)

 

이 사건은 BC 732년경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호세아왕 때에 멸망했고, 백성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성경에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왕하 18:11)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의 연대기를 보면

‘내가 사마리아 성읍을 포위하고 정복하여 그 성읍 주민 27,29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고

내가 정복한 나라들의 사람들을 거기 거주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르곤 2세의 연대기 BC 722 파리

 

북이스라엘 멸망 20년 후인 BC 701년에 산헤립왕은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는 유다를 함락시키려고 했지만 끝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고,

결국 앗수르 제국은 BC 612년 니느웨성의 함락과 함께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 사마리아

앗수르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이방인들과 섞여 살게 된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결국 이방인들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사마리아 역사의 일면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한

세겜에서 통치하다가 후에 요단강 동편 브누엘로 수도를 옮겨 갔습니다. (왕상 12:25 )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바아사, 엘라, 오므리왕은 디르사에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왕상 15:33, 16:8 )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

 

"유다 왕 아사 제삼십일 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이 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치리하니라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열왕기상 16:23-24)

사마리아성은 오므리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그곳은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의를 부끄러 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거품같이 멸망할 것이며" (호세아 10:5-7)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역대상 5:26)

앗수르 왕 불, 곧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요단 동편에 있던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을

앗수르의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앗수르의 이주 정책에 따른 민족의 이동

고산과 할라와 같은 지역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주되어 살던 곳입니다.

또한 앗수르 여러 지역의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킴으로써

결국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섞이게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왕하 17:24)

지도 동편에 있는 구다, 서편의 하맛과 하맛 남쪽의 아와, 스발와임 같은 지역 사람들을

사마리아 여러 성읍들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그 후 사마리아 지역은 여러 제국들에 의해 지배당하다가

BC 330년경에 헬라 제국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헬라화되었습니다.

당시에 수천 명의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정착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BC 63년경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이곳은 수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결국 로마 제국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BC 30년경에는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인 아구스도에 의해

이 지역이 헤롯 대왕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BC 4년경에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렸고,

AD 6년경부터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직접통치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빌라도가 유대 총독 자리에 있을 때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습니다.

저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마지막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4) 하시며

저주받고 멸시받는 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면서

이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 앗수르 멸망에 대한 성경의 예언

앗수르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이사야10:5)

하나님께서는 잔인한 앗수르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한 앗수르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지 않으신 일,

즉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결국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는 전쟁에서 패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을 남겼습니다.

그중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4-27)

이사야 선지자가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한 시기는 유다 왕 아하스의 마지막 해입니다.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이었을 때 앗수르 제국의 세력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당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의 주요 성읍들을 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라기스에 주둔하자,

히스기야는 그에게 성전과 왕궁의 막대한 은금을 바치고 유다를 지켜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은 휘하의 장수 랍사게와 대군을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하도록 하고 히스기야를 위협했습니다.

랍사게는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들을 향해 산헤립에게 굴복하라고 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했습니다.

 

"히스기야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 못 수도구 곁에 서매" (이사야 36:1-2)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44km 정도 떨어져 있던 라기스는 당시 유다 왕국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BC 701년에 앗수르에 함락되었습니다.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의뢰하니 무엇을 의뢰하느냐 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모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느냐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 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이사야 36:4-6)

랍사게는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에 비유했는데,

그의 말을 통해 당시 히스기야가 애굽과 화친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앗수르의 대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라기스에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이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감과 교만이 넘쳤기에 하나님을 비웃고 무시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찾아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한 영을 산헤립 속에 두어 그가 풍문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는 본국에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헤립의 라기스성 전승 기념 부조 BC 700-692

 

그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랍사게가 라기스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때 이미 산헤립은

라기스를 떠나 립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가 나와서 더불어 싸우고자 한다 함을 듣고 가서 그와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산헤립은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서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 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왕하 19:10) 하는 내용 의 편지를 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받은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약속하시고 산헤립의 멸망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 19:22, 32-37)

여호와의 사자가 하룻밤에 앗수르 군사 18만 5천 명을 쳤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던 산헤립은 유다 정복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완전히 패배했고,

두려운 마음에 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니느웨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거대했습니다.

그들은 당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유다의 도시들을 정복했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런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세는 하룻밤 사이에 역전되었고, 그들 은 패자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전투가 없었음에도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나훔서에는 급격히 쇠락해 갈 앗수르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앗수르 제국은 약해졌고 큰 세력으로 자라난 바벨론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결국 BC 614년에 바벨론에 침략을 당했고, 앗수르 사람들은 추방되거나 살해되었습니다.

BC 612년에는 니느웨가 바벨론에게 함락되어 앗수르인들은 하란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BC 610년에 바벨론 사람들은 앗수르의 잔존 세력에게 쳐들어 갔고

앗수르인들은 유브라데강 아래까지 도망쳤습니다.

그때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당시 애굽은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과의 전쟁을 위해

앗수르와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그미스를 향해 애굽에서 북쪽으로 가던 바로 느고는

이스라엘 영토를 통과하면서 유다 왕 요시야를 만났습니다.

요시야는 애굽 군대가 지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진군했지만,

므깃도 평야에서 애굽인의 화살을 맞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었습니다.

 

멸망 시기의 앗수르와 주변국들

 

BC 607년에서 606년경, 애굽의 군대는 갈그미스에 진을 쳤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갈그미스를 향해 진군했고,

BC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애굽 군대는 앗수르의 마지막 방패막이였으나

그들도 결국 느부갓네살에게 패배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패하여 달아나는 애굽 군대를 추격했고, 애굽 군대는 패망했습니다.

이 전투로 앗수르 제국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이사야 10:5-6, 12)

한때 큰 세력을 떨쳤던 앗수르 제국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교만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고, 그들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 사마리아의 교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었고,

말씀을 맡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청종치 아니했을 때에는

일곱 배로 그 죄를 징치한다는 무서운 저주도 놓여 있었습니다. (레 26:18 )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죄악의 길로 행했고

결국 BC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역사를 통해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교훈하시는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신약성경을 열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시는 내용을 첫 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요셉은 천사로부터

이사야 7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앗수르 제국에 관한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또 마태복음 2장에는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베들레헴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5-6절)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가 앗수르 제국 치하의 어떤 상황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제국의 역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진행된 모든 일들 속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을 때의 일을 기록한 이사야서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사7:1-2)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같이 흔들렸다고

유다 왕과 백성들의 두려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두 왕이 예루살렘을 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이사야 7:10-11, 14, 16-17)

예루살렘을 치는 두 왕이 패망하게 될 것과,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다를 보호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징조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시고 740년이 흘렀을 때 약속대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북쪽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들르셨고,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마리아 여자에게 밝히시고

그곳에 유하셨는데, 예수의 말씀을 믿는 사람 들이 점차 많아졌습니다.

저주받은 사마리아 땅에 예수께서 직접 가셔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서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호 13:16) 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복의 메시지 도 함께 주셨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호세아 14:4-7)

저주 아래 놓였던 북이스라엘 왕국,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회복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던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 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25-29)

한 율법사가 이렇게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고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6-37)

 

누가복음 17장에서도 한 사마리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까지 가는 여정 속에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셨는데,

나음을 입은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눅11-19절 ) 이 내용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처럼

율법의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고, 유대인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역사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사마리아인들을 버리지 않고 회복시켜 주겠다고

선지서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9-10)

 

저주받은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나무에 달려 저주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저주는 사실 죄인 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였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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