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러 나라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르네상스는 문예 부흥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의 부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부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본주의, 즉 인간 중심 사상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약 100년 후에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게 됩니다.
1450년에는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이동식 금속 활자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로 인해 인쇄술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책이 인쇄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방대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후에 이어지는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492년에는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후에 미국은 복음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이 먼저 있은 후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1) 거듭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이전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가톨릭교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공식적으로 처음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가톨릭교회와 맞서 싸웠고, 이에 대한 비판을 대중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틴 루터를 종교 개혁 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루터는 늘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당시 가까운 곳에 큰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는데, 이 일은 그가 법대를 그만두고 수도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 공부를 마친 뒤 신학 박사가 되었고, 1512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고, 인간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스승 슈타우피츠는 신약성경을 읽으라고 권했습니다.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한 방에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10년 동안 찾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깊은 생각 속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의에 대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기록된 것같이,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었다. 이렇게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낙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경 전체가 나에게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예전에 내가 너무 싫어했던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말로 붙잡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루터의 확실한 구원 간증이었습니다.
2) 95개 조 반박문
루터는 성경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은 없다고 믿었기에, 당시 지배적이었던 스콜라 신학을 성경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면벌부 판매의 관행에 반대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적었습니다. 그는 반박문을 기록할 때까지만 해도 가톨릭교회나 교황을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면벌부 판매에 대한 문제점을 공론화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죄를 없애기 위해 연옥에 갑니다.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벌을 받는데, 교회에서 면벌부를 구매하면 연옥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판매했던 면벌부의 규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고,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자금으로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대형 기업과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독일에서도 큰 규모로 면벌부가 판매되었는데, 어떤 판매자들은 앞으로 지을 죄나 이미 죽은 사람이 지었던 죄에 대한 면벌부도 구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면벌부 판매 책임자였던 한 수도사는 “금화가 짤랑 소리를 내며 돈궤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은 연옥에서 하늘로 튀어오른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면벌부 판매를 단호하게 반대하며 죄를 용서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으며,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에게는 면벌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면벌부가 거짓된 평안을 약속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을 가장 크게 비판했습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자신이 쓴 95개 조 반박문을 못 박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이날 반박문을 서신으로 발송했다는 것은 확인됩니다. 루터는 그 반박문을 라틴어로 먼저 썼고, 후에 독일어로도 썼습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발명에 따른 인쇄 기술의 발달은 루터의 글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519년까지 루터의 글은 25만 부 이상 인쇄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대중 매체를 통한 캠페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루터는 종교 개혁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면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만이 구원을 가져다주고, 이 일에 신부나 교황, 교회 등 그 어떤 중재자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 면벌부나 성체나 그 어떤 선한 행위도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3) 보름스 의회에서의 파문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이단으로 고소했고, 종교 재판을 위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자기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루터가 당시 머물던 지역의 영주였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로마로 넘기는 것을 거부하여 루터는 얼마 동안 종교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 개혁 운동은 힘을 얻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1520년 7월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루터에게 제국 금령을 선고하여 그를 파문하겠다고 협박했을 당시, 루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루터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보냈고, 여러 귀족들은 루터를 군사적으로 보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521년 1월에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언제 누구에게라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를 돕거나 보호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는 것은 언제든지 실행될 수 있는 사형 판결을 받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때 루터를 지지했던 권위 있는 많은 귀족들은 루터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찰스 5세는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 로마 제국 의회로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당시 보름스 제국 의회에는 7명의 선제후와 공작들, 후작들, 대주교와 수도원장들, 각 도시의 대표자들 등 2백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참모진, 성직자, 기사들과 동행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때 보름스에 머물렀던 방문자가 만 명이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보름스 시내의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시민들 대부분은 루터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반가톨릭 전단지들이 날마다 도시를 메웠고, 수백 명의 기사들은 군사력으로라도 종교 개혁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반면에 황제와 교황의 대리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교 개혁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1521년 4월, 마르틴 루터는 제국 의회에서 황제와 교황의 대리인 앞에 서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하루 동안 고심한 끝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철회를 거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를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논리로 설득하지 않는 한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실수를 범했고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의 양심은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압도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를 원하지도 않는다. 양심에 거스르는 일은 안전하지도,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에게 제국 금령을 선고하기 위해서는 투표를 통한 과반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제국 의회의 참석자들 대부분이 루터를 지지했기 때문에 황제는 속임수를 썼습니다. 루터와 루터를 지지하는 모든 선제후들이 보름스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루터에게 파문 선고를 내리고는 선고문 날짜를 조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제국의 모든 귀족과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은 보름스 칙령을 거부했습니다.
4) 독일어 성경 번역과 프로테스탄트 운동
제국 금령이 시행되었을 때 루터는 이미 가명을 사용하고 기사로 위장하여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주 만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의 단어를 하나하나 직역하는 대신, 평민들도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쉽게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번역한 성경에 대해 “엄마들이 집에서,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장터에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고 관찰한 후에 번역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번역본은 ‘9월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인쇄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루터가 잠적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종교 개혁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던 예배와 성찬의 형태가 모두 바뀌었고, 가톨릭 성인들의 조각상과 그림들은 교회에서 치워졌습니다. 사제들은 사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설교했으며, 일부 사제들은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고, 교회의 소유는 교황에게서 군주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종교 개혁을 받아들인 지역에서는 가톨릭교회가 힘을 잃었고, 일 년 뒤에는 루터도 숨어 지내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를 따르는 영지에서는 여전히 유죄 선고를 받은 범법자로 여겨졌지만, 비텐베르크에서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개혁한 교회에서 설교하며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수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루터는 선제후로부터 그가 처음 구원받은 장소인 비텐베르크에 있는 수도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을 뿐 아니라 학생들과 손님들을 맞으며 수도원을 모임과 배움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 후 루터는 여러 학자들과 함께 자신이 처음 번역했던 신약성경을 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도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첫 루터 성경은 153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언어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날 독일어에서 사용되는 표현 중에 많은 언어 표현의 어원이 루터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또한 16세기에 인쇄된 책 중에는 마르틴 루터가 출간한 책이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루터 교회들에게 “프로테스탄트(항거, 즉 ‘저항하는 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529년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였습니다. 당시 종교 개혁 운동을 지지하는 선제후들이, 루터를 규탄하고 그의 책들을 불태우라는 명령에 저항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슈파이어 제국 의회 이후로 개신교회들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5) 루터의 한계
그 후로도 종교 개혁 운동은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바랐던 방향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해 왔는데 종교 개혁 운동으로 인해 그 체계가 무너지면서 성직자들은 극심한 빈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국가와 연결을 유지하게 되었고, 목회자와 교사들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루터의 교회들도 선제후들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아 세례와 같은 의식들도 계속되었습니다.
또 루터의 교회에서는 자유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개인의 믿음을 확인하는 절차를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교회 안에 확실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루터는 이 사실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루터는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종교 개혁을 설파하며 인쇄 기술을 활용하여 그 사상을 대중들에게 널리 전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 사람들이 직접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 중에는 비판적으로 평가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루터는 야고보서에 숨겨진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서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가르친다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의 종교 개혁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이끈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한 직후인 16세기 초입니다. 당시 스위스는 오늘날과 같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독자적인 여러 주(칸톤)가 연합한 연방국이었습니다. 장 칼뱅은 프랑스인이지만 제네바에서 활동했고, 츠빙글리는 독일인이지만 취리히에서 활동했습니다.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함께 종교 개혁의 3인자라고도 불리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에 거주한 독일어권 개혁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신학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어 목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츠빙글리는 학업을 수행하던 중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와 그의 인본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 인본주의는 르네상스의 발생과 관련된 철학이었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지적 자유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중세 시대의 대세 학문이었던 스콜라 철학에 여러 방면으로 대치되는 사상이었습니다.
1519년에 츠빙글리는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가 되어 종교 개혁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일 설교에서 에라스뮈스의 신약성경 번역본으로 마태복음을 강해했습니다. 그 당시 성당의 주일 설교는 대본처럼 작성된 가톨릭 주석 목록을 읽는 정형화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츠빙글리는 주석 목록을 읽지 않고 직접 성경 구절을 찾아 읽었습니다.
주일마다 복음서를 강독하고 그 내용을 설명했는데, 마태복음부터 시작해 그다음 복음서로 이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종교 개혁의 원칙에 따라 성경을 설교의 직접적인 자료로 사용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큰 차이점은 성경의 계명을 따르는 정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류에게 주신 약속,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한 반면 츠빙글리는 성경의 계명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해야 성경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루터는 성경에서 금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허용한다고 명시되지 않은 것은 금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교회에서 초를 켜거나 조각상을 놓는 것을 금지했고, 그림이나 음악까지도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츠빙글리의 가르침은 취리히 일대에서 반대에 부딪혀 그는 이단 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 차례의 공개 토론을 성공적으로 마쳐 취리히의 교회에서는 성화가 치워지고, 가톨릭 미사가 폐지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에 대해서도 루터와 다른 견해를 보였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떡과 포도주에 있다고 보았는데, 츠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에 이를 두고 츠빙글리와 루터는 마르부르크에서 회담을 하기도 했지만,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가들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했으나, 성경을 해석하는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이 문제를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했습니다. 취리히에서는 취리히 기독교인들의 투표로 선출된 시 의회에 성경을 해석할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 교황과 사제가 가졌던 권위가 이제는 선출된 민중에게 이전되었고, 이는 ‘신앙의 민주화’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국가가 얽혀 있다는 점이 취리히 종교 개혁의 특징입니다.
취리히 종교 개혁은 152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로는 성만찬이 추모를 위한 기념 식사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그림을 거는 것이 금지되었고,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폐지되어 성직자들도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츠빙글리도 결혼을 했습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움직임은 취리히 전역에서 받아들여졌지만, 가톨릭을 유지한 이웃의 칸톤들과 수차례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1531년 취리히에 전쟁을 선포했고,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전사한 츠빙글리의 시신은 넷으로 나뉘어 불태워졌습니다. 이후 하인리히 불링거가 츠빙글리의 과업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츠빙글리 사후에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이끄는 역할은 제네바의 종교 개혁가 장 칼뱅에게 넘어갔습니다.
2) 장 칼뱅의 종교 개혁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프랑스 출신입니다. 그는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는데,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33년에 파리 대학교 총장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라고 연설한 내용이 파문을 일으켜 큰 반대에 부딪힌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칼뱅은 연설문의 초고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개신교도들의 상황은 매우 나빠졌고, 많은 이들이 박해를 피하고자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칼뱅도 1년 후에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로 갔습니다.
그 후 칼뱅이 작성한 글은 그를 유럽의 유명 인사로 만들었습니다. 1536년에 라틴어로 출간된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 신앙의 가르침을 담은 학습서였습니다. 이 책은 당시 종교 개혁 사상의 기초가 된 모든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훗날 16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출판물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칼뱅은 그의 삶 전반에 걸쳐 <기독교 강요>의 저술을 이어 갔습니다. 초반에는 여섯 개의 장으로 시작했지만, 말년에는 80개 장에 이르렀습니다. 칼뱅은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초를 다루었으며, 특히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그 후 <기독교 강요>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전해지게 되었고, 후에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칼뱅의 사상은 스위스로부터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고, 그는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 과정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을 때, 취리히에서는 시 의회에 그 권위가 주어졌으나, 칼뱅은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독자들이 성경을 스스로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요 교리를 종합적으로 가르치고자 했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성경이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기독교 강요>에서 거론된 요점 중 하나는 예정론입니다. 칼뱅의 예정론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저주받도록, 사람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이미 선택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한 1536년, 그는 이미 <기독교 강요>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그 1년 전부터 종교 개혁을 실행하자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기욤 파렐이라는 인물이 개혁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파렐은 제네바에 막 도착한 칼뱅을 만났고, 그가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도울 최적의 인물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칼뱅에게 제네바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개혁안은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1538년에는 두 사람 모두 제네바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하지만 1541년에 칼뱅의 지지자들이 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그들의 개혁안이 받아들여졌고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네바는 박해받던 기독교도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또한 잘 단련된 기독교 교회의 모범이자 목회자와 설교자들을 위한 훈련소가 되었습니다. 유럽 전역의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제네바로 몰려들었습니다.
칼뱅도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생활 습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성경에 따르면 어떠한 인간도, 교황이나 국왕조차도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주장이 현대 정부 발달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도 해석합니다.
칼뱅주의는 네덜란드, 프랑스,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폴란드나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 국가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개혁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자신들이 신종 교회 집단이 아니라 사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교회의 한 지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들, 즉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스위스에서 일어난 칼뱅 중심의 개혁 교회는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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