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르네상스 이전까지를 중세 시대라고 합니다.
중세 이전까지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발달했으나
이 시기에는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신본주의(神本主義) 사상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하는 문예 부흥 운동이 일어나
다시 인본주의 사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약 천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종교적인 교리가 강요되어
학문과 예술의 발달이 더디게 진행되거나 오히려 쇠퇴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시기를 두고 ‘중세 암흑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 중세 시대의 주요 흐름
1) 교황 제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제도가 교황 제도입니다. 로마는 제국 내의 큰 도시마다 교회의 감독을 두었는데, 로마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진 후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네 곳의 감독이 총대주교로 임명되어 큰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440년에 로마 교회의 감독이 된 레오 1세가 스스로 베드로의 후계임을 공식화하면서 자신이 교회 전체에서 최고 위치임을 자처했습니다. 당시 훈족과 반달족이 로마 제국을 침략했는데, 권한이 약화된 황제가 백성들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레오 1세의 중재로 이민족들이 물러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레오 1세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매우 커졌고, 훗날 그는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교황에게는 교회가 세운 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종교 재판을 위한 규정도 만들어졌습니다. 교회는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실생활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아 세례부터 결혼식, 장례식까지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련 있는 모든 행사가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구원은 교회의 구성원에게만 허락된 개념이었고, 죄 사함과 천국의 평안은 교회의 제도를 따를 때 공인된 성직자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국경을 초월해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조직이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통치 기간에 전례가 없는 정치적인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는 1198년 10월에 <만물의 창조주처럼(Sicut universitatis conditor)>이라는 라틴어로 작성된 칙령에서 국가가 교회에 예속된다는 신학적인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낮과 밤을 주관하기 위한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만드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교황에게 주신 권위는 왕의 권위를 능가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서유럽에는 교회에 도전할 만큼 강력한 국가나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나 황제들은 교회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4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 국가나 공국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는 나라였고, 독일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잃고 많은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있던 탓에 황제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지위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해졌고, 그 권력은 더욱 중앙 집권화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의 권력과 같았습니다. 주교들은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교황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수도회도 설립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대사들은 교황의 명령이 모든 국가에서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를 주시했습니다.
소작농부터 권력자까지 모두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교황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파문의 위협이었습니다. 교황의 파문 선언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강제로 분리해 낼 수 있었습니다. 파문된 사람은 판사, 배심원, 증인, 변호인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후견인이나 유언 집행자, 계약 당사자도 될 수 없었습니다. 미사 중에 파문된 사람이 교회에 출입하면 미사가 중지되고 그 사람은 쫓겨났으며, 사망한 후에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습니다. 만약 성스럽게 여기는 땅에 매장되었을 경우에는 교회가 그 시신을 파냈고, 묘지를 파괴했습니다.
교황의 두 번째 무기는 금령(禁令)이었습니다. 파문이 개인을 향한 것이었다면, 금령은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군주 혹은 그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 전체를 처벌하는 것이었습니다. 금령을 받은 나라에서는 세례식과 종부성사를 제외한 모든 성찬과 성사가 중단되었고, 예배도 전부 금지되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왕과 군주들을 금령을 통해 협박함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심지어 크고 작은 여러 나라에서는 교황을 그들의 주권자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2) 십자군 전쟁
중세 시대에는 2백 년 가까이 십자군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지리적 요충지가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8세기에는 전체 기독교인의 절반가량이 이슬람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점점 확장되면서 동로마 제국을 침범하자 1095년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서방 세력의 원군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의 탈환을 주장했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 수복을 위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우르바누스 교황은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이 일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고, 이들에게 영적 보상뿐 아니라 물질적 이득까지 약속했습니다. 그가 연설을 마치자 군중들 사이에서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11세기에 셀주크 제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북쪽의 소아시아로 진격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셀주크 제국에 맞서 필사의 노력을 펼쳤지만 1071년에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했고, 동로마 제국은 제국의 수입원이자 군대의 원천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을 상실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그 목적은 성지 회복에서 불신자들을 정복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시작과 함께 유대인들에 대한 끔찍한 공격과 박해도 시작되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끼리 폭력을 행사하고 약탈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랜 원정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면벌부의 발행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그에 따른 추가 수입은 대성당 건축에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오만은 극에 달했는데, 이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주장, 즉 ‘교황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하나님의 아래이자 사람의 위에 자리한 세상의 심판자’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교회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대성당들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성당의 규모는 교회의 권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쾰른의 대성당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3) 아비뇽 유수
13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슈타우퍼 왕조가 몰락한 후, 프랑스 왕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즉시 교황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1309년부터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된 1377년까지 일곱 명의 프랑스 출신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며 프랑스 교황청의 행정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프랑스 왕국에 교황청이 있었기에, 이것은 프랑스의 힘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세속적인 권세와 영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4) 스콜라 철학의 등장
스콜라 철학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적인 증명법을 기반으로 한 학습 방법이었습니다. 질문하고, 검토하고, 세부 사항을 논리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신중하게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스콜라 철학 사상은 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지식이 믿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스콜라 철학을 통해 철학적-합리적 방식으로 논의되었고, 신학에 과학적 성격이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세상의 지식은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고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습니다. 그는 자연 이성이 신학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고, 신학이 최고의 과학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혼합한 표준 신학 서적을 여러 권 저술했는데, 이는 새로운 가톨릭교회법 제정을 위한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게 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수많은 교황의 칙령에 서로 모순된 내용이 있었으나, 이러한 모순은 신학적 논증을 거쳐 정리되었고 그를 통해 체계적인 교회법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체계 정립과 함께 대학교도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사상 체계를 터득한 교사들은 매우 인기가 있었고, 특히 인기가 많았던 교사들은 대학 설립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의 대학 강의는 거리의 창고,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도시의 교회와 광장, 파리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교사들이 강의실을 임대했고, 학생들은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들었습니다. 당시의 교수법은 주로 독해와 토론이었습니다. 교사와 학생은 초기 스콜라 철학의 문답법으로 토론했고 이러한 토론 방식의 일부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스콜라 철학 교수에 따르는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교황의 권위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교회의 면밀한 감시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교육은 신학과 철학을 혼합함으로써 사람들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5)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1440년경 독일의 마인츠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이동식 금속 활자를 사용한 유럽 최초의 활판인쇄기를 개발했습니다. 그가 1452년에서 1454년 사이에 인쇄한 라틴어 성경은 두 권의 책으로 이루어졌고 1,300페이지에 달했습니다.
1454년에 외교관이자 훗날 교황이 되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비오 2세)는 프랑크푸르트 도서 박람회에서 구텐베르크 성경의 전체 판본이 매진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1454년에서 1455년 사이에 교회에서 발행한 면벌부 역시 매우 인기 있는 인쇄물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죄가 속해질 것을 기대하며 면벌부를 샀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시스템은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를 일관된 품질로 인쇄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15세기 후반에 일어난 미디어 혁명에 기여했습니다. 이후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그들의 반대파들도 모두 인쇄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종교 개혁을 견인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저술과 그의 성경 번역본이 대량 배포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성경이 성직자와 지식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인쇄기 발명 후에는 일반 대중도 성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 중세 시대 복음의 흐름
300년 이후,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한 후로 주류 교회의 흐름은 복음의 본질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전한 것과 같은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계속 그 맥을 이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믿음과 가르침은 주류 교회의 교리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했던 소아시아에는 바울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남아서 복음의 맥을 이어 갔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핍박을 피해 발칸반도로 이동했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거쳐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보고밀파입니다.
보고밀파는 로마 교회의 성직 제도나 성례 의식을 따르지 않았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큰 교회 건물을 짓고 미사라는 형태의 예배를 드렸으나, 이들은 성경 한 권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됨으로써 보고밀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 알비파
이후 보고밀파는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 지역에까지 이동했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알비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알비파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알비파에 속한 사람들 중에 피에르 드 브루에이스라는 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계속해서 전했던 사람인데, 그가 가르쳤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는 누구도 침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예배를 받으시니 애써 교회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다.
- 십자가를 숭배하면 안 된다.
-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이며, 이것이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 기도나 선한 행실은 죽은 자를 이롭게 하지 못한다.
그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는 누구도 침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유아 세례가 필요하다고 했던 로마 교회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대성당을 건축하는 것과 성상 숭배 사상, 화체설을 반대했기에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복음은 프랑스 남부 지역에 계속 활발하게 전해졌고,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교황은 남부 프랑스 지역 사람들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1209년부터 20년 동안 진행된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은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229년에는 교황이 프랑스 툴루즈에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했습니다.
- 평신도들이 라틴어 시편을 제외한 모든 성경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한다.
- 성경의 어떤 부분도 라틴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당시는 라틴어 성경밖에 없었는데, 평신도들이 라틴어 시편을 제외한 다른 성경을 소유하는 것과 성경을 라틴어 이외의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따라서 라틴어를 아는 사람은 시편만 읽을 수 있었고,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알게 됨으로 인해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 교회를 따르지 않는 일이 계속해서 생겼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후 알비파는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고, 먼저 살던 발칸반도 지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 발도파(왈도파)
이탈리아 북부 지역, 알프스 남쪽 지역은 산세가 굉장히 험해 오랫동안 로마 교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아 순수한 복음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믿음을 지켜 간 사람들을 발도파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던 이들 중에 페트뤼스 발데스(피터 왈도)라는 사람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페트뤼스 발데스는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발도파의 형제들과 함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독일에 가서도 복음을 전했고, 생의 마지막에는 체코의 보헤미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발도파는 구원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또 이들은 어떤 특별한 신앙 고백이나 규율 등을 갖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성경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시는 교황이 ‘모든 인간은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할 정도로 교황의 말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의 주장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교황은 이들과의 어떤 교류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금령을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북부 산간 지방에 많은 핍박이 시작되어 14세기 말까지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3) 존 위클리프
14세기 말 영국에는 존 위클리프와 그와 함께했던 롤러드파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었는데,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였던 위클리프도 로마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만이 진리이고, 성경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옥스퍼드에 있는 학자들과 함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이로 인해 평신도들이나 여성들도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여러 신부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했는데, 위클리프를 시기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이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며 계속 말씀을 전하는 것을 비꼬아 ‘중얼거리는 자들’이라는 뜻의 ‘롤러드파’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옥스퍼드 대학을 떠나야 했지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아 순교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30년 후인 1414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를 이단으로 공식 선고했고, 1428년에는 그의 묘지를 파헤치고 유해를 불에 태웠습니다.
훗날 위클리프의 주장은 보헤미아의 후스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얀 후스
위클리프와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잉글랜드의 한 왕이 보헤미아의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보헤미아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일어났고, 각 나라의 학생 간에도 교류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보헤미아의 제롬이라는 사람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롬은 위클리프가 전했던 내용을 접하고 크게 감명을 받아 고향인 보헤미아로 돌아와서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때 제롬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얀 후스입니다.
후스는 프라하의 대학에서 총장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그가 설교했던 베들레헴 교회는 지금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남아 있습니다. 베들레헴 교회에는 예전부터 체코어로만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라틴어 성경밖에 없었기 때문에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라틴어 성경을 읽었는데, 라틴어를 모르는 평신도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후스는 베들레헴 교회에서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했으며,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복음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또 구원은 은혜에 의해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와는 관계없다는 정확한 복음의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페트뤼스 발데스의 가르침을 받았던 보헤미아의 발도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보헤미아 왕부터 귀족들, 대학의 교수들, 많은 국민들이 후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알아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로마 교회의 입장과 대치되었기 때문에 결국 로마 교회는 후스를 파문하고 위클리프의 저서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후스를 콘스탄츠 회의로 불렀습니다. 후스는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자 회의에 갔지만 그곳에서 종교 재판에 넘겨졌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결국 순교했습니다.
이때 사형 집행관이 후스에게 ‘당신이 지금까지 말한 것을 부인한다면 살려 줄 수 있는데 그럴 용의가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후스는 “하나님께서 증인이시거니와 나에 대한 증거들은 다 허위요 조작이다. 나는 단 한 가지, 가능하면 사람들의 영혼을 죄에서 구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설교한 일이 없다. 나는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쓰고 가르치고 설교했다. 오늘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후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도 복음은 계속해서 보헤미아 지역에 전파되었고,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복음 운동은 계속되었고, 그곳에서 연합 형제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은 훗날 일어날 종교 개혁이나 전 세계에 복음을 전했던 모라비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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