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제국 역사의 흐름
네로 황제 사후, 로마는 플라비우스 왕조(AD 69~96) 시기를 거쳐 5인의 현명한 황제들이 통치를 했다고 하는 소위 5현제(AD 96~169)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지중해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하여 팍스 로마나라고도 불렸던 이 시기는 로마 제국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던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군인 출신의 황제들이 등극하고 암살을 당하는 일들이 계속되면서 로마는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습니다.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니코메디아로 옮기고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각각을 황제와 부황제들이 다스리는 사두 정치(四頭政治)를 실행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이후에 서로마의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는 쿠데타를 일으켜 312년에 서로마 지역을 차지하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서로마 지역의 황제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전날 밤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그다음 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이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듬해인 313년에 밀라노에서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살아 오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지역을 공격하여 로마 전역을 통치하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330년에는 통일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고, 후에 이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현재 튀르키예(터키)의 한 도시 이스탄불인데, 지금까지도 당시 로마 제국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395년에 서로마와 동로마의 두 개의 제국으로 나뉘었습니다. 통일 로마의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맏아들에게 동로마를, 둘째 아들에게 서로마를 물려주었습니다. 그에 따라 교회도 동서로 나뉘었고, 훗날 서로마에서는 가톨릭교회가, 동로마에서는 그리스 정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경 게르만족의 침략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천 년 정도 더 역사를 지속하다가,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여 중세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스탄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 스였을 때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처음 건축했으나 계속되는 반란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재건축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532년부터 537년까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건축한 것이며,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로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그곳 영토에 있던 여러 부족은 독립 국가들을 세웠는데, 그중 가장 강한 왕국은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부족 국가로 시작했다가 점차 다른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하고 서유럽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초대 왕 클로비스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프랑크 왕국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잡은 카롤루스(샤를마뉴) 1세는 800년경에 교황으로부터 정식 황제로 임명받고 카롤루스 대제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왕권이 가장 강력했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이 시기를 역사학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손자들 대에 왔을 때인 9세기경에 세 나라로 분열되어 동프랑크, 서프랑크, 남프랑크 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후에 각각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됩니다.
동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는 오토 1세 때입니다. 동프랑크 왕국은 공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를 부여받았고, 오토 1세는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받았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9세기에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을 제1 제국이라고 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제2 제국이라고 하며, 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가 독일에서 제3 제국을 일으키려고 전쟁을 벌였다가 패전했습니다.
610년경에는 마호메트에 의해 이슬람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이슬람교는 150년 사이에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기독교가 북아프리카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를 지나 지중해 전반에 확산되어 있었는데, 이슬람교가 확장되면서 기독교가 북쪽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후에는 이베리아반도, 즉 지금의 스페인까지 확장되었고, 동쪽으로는 소아시아까지 이슬람화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 특히 서방 교회는 서유럽 쪽으로 몰려 수백 년 동안 교세를 확장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현상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 기독교 역사의 흐름
서기 300년 이후 시대가 그 이전 시대와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것은 기독교가 국교화가 되면서 기독교인을 향한 핍박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정치권력과 교회가 결합하여 기독교는 복음의 본질과 멀어져 가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313년에 모든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은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로부터 약 70년 후인 380년에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임을 인정하는 내용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칙령이 반포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정치권력과 교회가 결합해 가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로마 지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 지역의 황제 리키니 우스와 함께 공표했다.
1) 니케아 공의회
이 시기부터 로마의 황제가 직접 교회의 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회의가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 교회가 자신을 뒷받침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려면 교회의 세력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했는데, 당시 교회는 내부 갈등이 심해 서로 분열되어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동일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위대한 피조물 정도라고 주장하여 교회 내에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로마 전체에 있는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과 감독들을 소집했고, 이 회의를 통해 기독교에서 원래 믿고 있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삼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문서로 작성하여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입니다.
2) 성직자의 권한 강화
그 후로도 황제가 주관하는 교회의 회의가 많이 열렸는데, 교리적인 내용을 의논하는 자리에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와 같이 정치권력과 교회가 결합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감독들이나 성직자들의 권위를 높이는 교리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만든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 때문에 마음고생이 컸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으면서 빛을 발견하고 그 경험을 자신의 참회록에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 후 그는 침례를 받고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은혜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성직자가 주관하는 성례 의식, 곧 침례나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공식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바탕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회에서는 성직자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 혹은 주류 교회가 말하는 것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거나 또 교회로 데려오려고 할 때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하신 말씀의 ‘강권’이라는 말을 강제력으로 해석하여 그렇게 주장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종교 재판에 넘겨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핍박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3) 교황 제도의 등장
로마 제국에서는 점점 제국 내의 큰 도시마다 교회의 감독들을 중심으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진 후로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리아의 안디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네 곳의 감독들이 총대주교로 임명되어 큰 권위와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 지도 참조) 그리고 제국이 동서로 나뉜 후로 서로마 제국은 로마 교회의 감독을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황 제도라고 하는 단일화 된 성직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교회와 감독은 다른 지역 교회에 비해 권위를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로마가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였기도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풍요로워서 다른 지역의 성도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 교회나 로마 교회의 감독은 자연스레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들이 베드로의 후계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것을 내세우고,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베드로라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베드로의 후계인 로마 감독들은 로마 교회 전체의 수장의 위치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440년에 레오 1세가 로마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라는 것을 공식화했고 로마 전체 교회에서 최고의 위치임을 자처했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교황 제도의 시작입니다. 그러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감독 역시 자신이 교회 전체의 수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한 명의 감독들이 서로 자신이 최고의 위치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란은 예수님 생전에 제자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논쟁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9:33-3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3-45)
분명히 예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끝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으나 교회의 수장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사이의 세력 갈등은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둘이 갈라지게 된 본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4) 동서 교회의 분할
그 동기가 되었던 사건은 8세기에 있었던 성상 파괴 운동입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예수님이나 사도들, 마리아 혹은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성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726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이것을 우상 숭배로 여기고 성상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서로마의 교황이 그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동로마와 서로마 교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1054년에 동로마 교회의 수장과 서로마 교회의 수장이 서로를 파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둘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로마의 교회를 동방 정교회라고 부르고, 서로마 교회를 로마 가톨릭이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도 이 둘은 각각 역사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성장하면서 러시아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러시아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뒷배경이 되어 줄 세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로마의 교황은 자신을 보호해 줄 정치적 배경을 찾았고, 프랑크 왕국이 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카롤루스 대제의 아버지인 피핀은 당시 프랑크 왕국의 궁재(재상)였기에 왕이 되려면 정치적 정당성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서로마 교회의 교황이 그의 이마에 기름을 발라 주며 그가 신에게 왕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이 인정한 왕이라는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앞장의 지도를 보면 파란색으로 표시된 ‘교황령’이 있습니다. 교황령은 교황이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영토인데, 피핀이 처음으로 교황에게 교황령을 주었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은 왕들은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교황을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가 왕이 되었을 때, 교황은 카롤루스에게 로마 제국을 잇는 제국의 황제라는 의미로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해 주었습니다.
교회와 정치권력 간의 결합은 계속 이어져 시간이 흐를수록 왕들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임명받는 형태로 굳어져 갔습니다.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왕들을 임명하는 위치가 되었고, 후에는 그 권위가 왕보다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5) 수도원의 등장
정치권력과 교회가 결합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자 교회를 떠나 혼자 고행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수도사’라고 부르는데, 첫 번째 수도사는 안토니우스 혹은 안토니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3~4세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후에 그의 뒤를 따라 수도사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늘어나자 이들끼리 모여 사는 수도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유럽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제롬이라고도 하는 히에로니무스입니다. 그는 4~5세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성경 번역본이 ‘불가타(Vulgate) 성경’이며, 이 성경은 지금까지도 로마 교회의 공인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과 함께 이 불가타 성경도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수도원마다 서로 다른 규율을 적용했으나 530년 즈음에 베네딕트 수도사가 수도원 공동체를 위한 규율을 정비했습니다. 그 후 많은 수도원에서 베네딕트의 규율을 따랐는데, 그런 수도원들을 베네딕트 수도원이라고 부릅니다.
수도원은 본래 세속화된 교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도원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되고, 교황의 자리까지 오르기도 하면서 로마 교회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6) 영국의 교회
영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양상은 유럽 대륙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의 기독교는 유럽 대륙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군인이나 상인에 의해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6세기경에는 영국의 많은 곳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수도사들은 고행을 다니다가 적당한 지역을 찾으면 그곳 마을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인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영국의 교회는 국가의 권력이나 로마 교회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세기 말에 베네딕트 수도회에 소속된 40여 명의 수도사들이 잉글랜드 지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국의 교회도 로마 교회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교황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들은 먼저 선교를 하고 있던 사람들과 갈등을 겪으며 그들에게 박해를 가했고, 시간이 갈수록 영국 내에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14세기에 영국의 교회 개혁을 주장했던 존 위클리프가 등장하는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 복음의 흐름
초대 교회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통해 박해를 받았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313년에 공표된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후로는 교회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정치권력과 손을 잡게 되었고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복음을 지키려고 했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단 취급을 받아 오히려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1) 스페인의 프리스길리안파(4~6세기경)
프리스길리안은 이베리아반도(현재의 스페인) 알비라 지역의 교회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아 교회의 감독으로까지 임명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그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380년에는 마니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사라고사에서 고소를 당했습니다. 마니교는 특별한 영적 지식을 얻었을 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이었는데, 프리스길리안은 마니교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치는 설교를 많이 했음에도 오히려 마니교도이고 영지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3년 후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 고소를 당해 현재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에서 재판을 받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서로마의 황제였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재위 383~388)는 황제가 될 사람이 아니었는데 황제 자리에 올랐기에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베리아반도 지역의 감독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프리스길리안에게 미신을 믿고 주술을 행한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프리스길리안은 그를 옹호하던 여섯 명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막시무스 사후에 그의 반대파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프리스길리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프리스길리안을 고소했던 사람들은 처벌되었고, 프리스길리안은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알비라로 이장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프리스길리안의 순교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그의 사상은 이베리아반도와 보르도 지방의 아키타이나까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2백 년이 지나서 프리스길리안파는 다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추방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으며 심지어 사형을 당하는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이베리아반도 지역에서는 더 이상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프리스길리안은 모든 주장은 성경을 근거로 해야 하며 그 어떤 이론보다도 성경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성경 외에도 다른 역사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런 주장이 오해를 받아 그가 성경이 아닌 내용들을 성경에 편입시키려고 한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여성과 아이들도 성경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제로 상당히 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성경 공부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논쟁은 무의미하며 실제 중요한 것은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성경의 가르침이 실천되느냐이고, 구원의 복음은 인간을 죄악의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세상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정당했으나 그가 이단으로 몰려 사형까지 당한 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항상 핍박이 따른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2) 소아시아의 바울파(~9세기)
소아시아에 전해진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사도 시대 때부터 약 1,500년이 지나도록 복음의 명맥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에 대한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 흔적도 너무나 옅어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복음이 전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강한 힘으로 복음을 지키고 계셨던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바로 소아시아 지역입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을 피해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1,500년간 지속되다 보니 시대에 따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 달라졌습니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짐에 따라 이들을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는데, 처음에는 이들을 바울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바울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지만, 이들이 스스로를 칭한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낮추어서 부른 이름입니다. 또 이들을 톤락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톤락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전한 복음은 근근이 이어졌고 9세기까지도 바울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세속화된 기독교 세력이 이들을 핍박하며 이들과 관련된 모든 문서를 없앴고 후대에는 이 지역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울파는 성경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보니 이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동로마 사람들은 서로마 사람들에 비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조금 더 가까웠습니다. 이로 인해 소아시아에서 먼저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났고, 우상을 숭배한다든지 하는 잘못된 교리에 저항하는 힘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바울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바울파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했던 아르메니아 지역의 셈바트나 소아시아 중앙 고원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목수 세르기우스를 들 수 있습니다. 7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아르메니아 사람이 썼다고 전해지는 책 <진리의 열쇠>에는 바울파의 신앙과 행동에 대해 자세히 저술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에는 회개하여 믿은 후에 침례를 받아야 하며, 중보의 능력은 성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장로로 임명될 때 채찍질, 투옥, 매질 등 모든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임명되었는데, 이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삶을 다 버릴 각오를 해야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해야 했던 고난들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보고밀파
핍박받던 바울파는 아라비아반도 쪽에서 이슬람 사람들이 계속 침략해 오자 이를 피해 점차 서쪽으로 이동했고, 8세기 중엽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드라게 지역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이들을 추방했고, 쫓겨난 이들은 또 밀려가기를 반복하다 세르비아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박해를 받아 보스니아까지 이동했습니다.
이들을 ‘보고밀파’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한 자료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이들을 이단이라고 고소한 문서가 있는데, 그 문서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세례는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세례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비록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행해진 세례 의식은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은 손을 얹음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믿음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받게 된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이단으로 몰려 순교를 당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핍박을 견디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31-33)
결국 예수께서 홀로 될 때가 닥쳤으나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하셨고, 이는 복음이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사 속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서는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신다는 것을, 그 힘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4. 인문 > &. 성경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사4(청교도운동-독일/스위스 종교개혁) (0) | 2024.07.21 |
---|---|
교회사3(중세 시대) (2) | 2024.07.21 |
교회사 1(초기 교회의 박해) (0) | 2024.07.21 |
성경속 이야기6(로마제국과 예수 그리스도) (0) | 2024.07.20 |
성경속 이야기5(헬라제국과헬레니즘) (0) | 2024.07.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