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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 성경탐구

영어 성경 번역의 역사(킹제임스성경까지)

by 우연!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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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은 시대가 지나면서 변할 수 있지만,

성경 말씀이 설명하고 있는 진리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언어는 달라도 복음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라틴어, 그리스어, 스코틀랜드의 게일어, 영어로도 기록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로도 표현되어야 하는데,

특히 영어로 기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번역의 목적은 그 나라의 관용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해 줄 완벽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신구약 성경 전권을 영어로 번역한 존 위클리프가 한 말입니다.

그는 성경 말씀이 어떤 언어로 번역되든

복음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또 성경은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성경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도록 항상 주의하며 번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영국에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6세기경이었습니다.

로마의 수도사들이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경을 영국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앵글로색슨 민족은

‘고대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성경의 일부를 고대 영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성경 말씀은 대부분 구두로 전해졌습니다.

말씀을 순수하게 전했다면 이러한 전달 방법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당시 가톨릭교회는 부패했기 때문에 말씀도 변질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4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였던 위클리프는 이에 대한 문제를 인지하고

성경을 영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위클리프는 지금까지 ‘종교 개혁의 샛별’로 불립니다.

위클리프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이었지만

사람들은 ‘중세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1320~1384)

 

위클리프는 사복음서를 혼자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약성경 전체도 직접 번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롤러드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번역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1384년에 완성되었고, 1388년과 1395년에 개정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위클리프가 설교를 통해 자신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몰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분쟁이 일기도 했지만 위클리프는 비교적 큰 방해 없이 성경을 번역했고,

1384년에 고령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위클리프 성경 (고딕체를 사용하여 손으로 기록되었다.

영어를 아는 사람도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 영어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페이지의 좌측 상단에 그림으로 장식된 첫머리 글자

‘T’는 마태복음 첫 구절의 첫 단어인 ‘The’의 첫 글자를 장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인 1415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공식 발표했고,

그의 무덤을 파서 남은 뼈를 소각하고 그 재를 근방 스위프트강에 뿌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로부터 100년 동안 아무도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존 위클리프가 죽고 41년 뒤에 일어난 부관참시

 

그러나 이 기간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1440년에는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발명했고,

1516년에는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원본에 라틴어 번역을 같이 단 신약성경을 펴냈습니다.

위클리프 당시 영국 사람들이 사용했던 ‘중세 영어’는 시간이 지나며

‘근대 영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근대 영어는 요즘 사용되는 영어보다는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영어에 가깝습니다.

이때도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거나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는 것은

여전히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16세기 초에 용감한 번역가가 나타났습니다.

윌리엄 틴들이라는 옥스퍼드 대학 학자였습니다.

뛰어난 성경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며 여덟 개의 언어에 능통했던 틴들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밭에서 쟁기질하는 아이가 교황보다 더 성경을 잘 알게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영어 성경 번역에 대한 허가를 받고자 했지만, 가톨릭교회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번역 작업을 계속할 경우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틴들은 영국을 떠나 유럽으로 피신했습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며 금속 활자로 인쇄도 가능했습니다.

또한 루터의 성경과 다른 독일어 번역본들도 이미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틴들은 독일에 머물며 히브리어를 배웠고,

이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 신약성경 전체와 모세 오경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4분의 1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윌리엄 틴들(1494?~1536)

 

당시 틴들의 신약성경은 2만 부가 넘게 영국으로 밀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국에서는 영어 성경책을 소유한 것이 발각되면 성경책은 압수되었고

소유한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영어 성경책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책은 대부분 불에 타 파손되었습니다.

 

틴들의 죽음

 

결국 틴들은 체포되었고, 1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을 당했습니다.

틴들의 죽음에서 조금 특이한 점은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으므로

화형을 시키기는 하지만, 학자로서 대단히 존경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죽이고자 목을 졸라 죽인 후에 불에 태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했던 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헨리 8세(1509~1547 재위 )

 

당시 영국 왕은 헨리 8세였습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생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첫 부인은 그의 형수이자 아라곤 왕국의 공주인 캐서린이었습니다.

그는 형이 죽은 후 아들을 얻고자 형수와 혼인했지만, 캐서린 왕비는 딸만 낳았습니다.

실망한 그는 혼인을 무효로 하고자 교황에게 요청했지만, 교황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교황의 결정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여

영국 국교회를 만들고는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캐서린과의 혼인을 취소하고 앤 불린과 결혼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캐서린과는 달리, 새로 왕비가 된 앤 불린은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앤 불린은 틴들의 신약성경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영국의 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개신교인 왕비를 맞이하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로 인해

영국의 종교 상황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일스 커버데일(1488~1568)

 

틴들과 함께 옥스포드에서 일했던 학자 마일스 커버데일은

정치적으로 예리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급변하는 영국의 시대 상황을 기회 삼아 영국으로 돌아와서 틴들이 하던

성경 번역 작업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인쇄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경책에 틴들의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헨리 8세가 재위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여러 성경 번역본이 인쇄되었습니다.

모두 틴들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번역한 성경이었지만,

틴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처음 인쇄된 성경은 ‘커버데일 성경’이었습니다.

그 후 ‘매슈 성경’이 인쇄되었습니다.

매슈 성경은 커버데일 성경과 거의 동일했으며,

케임브리지 출신의 존 로저스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본래 신부였지만 신부직을 버리고 앤트워프에 머물던 틴들과 합류했습니다.

틴들은 로저스의 멘토 역할을 했으며,

그가 구원받을 수 있게 인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저스는 틴들이 번역하던 성경을 완성하기 위해 커버데일과 함께 일했습니다.

 

 

한편 헨리 8세는 원하는 것을 반드시 차지하고자 했던 그의 성격대로

자신만의 성경 번역본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번역본은 ‘대성경(the Great Bible)’이라고 불렸습니다.

 

헨리 8세의 지시로 1539년에 번역되어 만들어진 대성경. 크기가 아주 컸다.

헨리 8세는 영국의 모든 교회가 이 성경책을 소장할 것을 명했고,

이 성경은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성경책을 보기 위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폭동이 일어날 정도가 되자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에 쇠사슬을 달아 강단에 묶어 둘 정도였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규칙이 있었는데

, 누군가가 성경을 소리 내어 읽으면 제한된 숫자의 인원만 들을 수 있었고,

한 사람이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앉아서 조용히 들어야 했다.

 

헨리 8세의 사후에는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메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메리 여왕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자랐기 때문에 영국의 종교 상황은 또다시 급변했습니다.

메리는 영국에 있는 모든 개신교인을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메리가 재위하는 동안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 사람의 수가 3백 명이 넘었습니다.

그중 첫 순교자가 매슈 성경을 출간한 존 로저스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개신교인들이 영국을 떠나 유럽으로 갔고,

그중 많은 이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였습니다.

제네바에는 장 칼뱅, 존 녹스, 마일스 커버데일을 비롯해

많은 언어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망명해 있는 동안 가족들에게 보낼 수 있는 성경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틴들의 신약성경을 기본으로 하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루터의 독일어 성경과 다른 독일어 번역본을 대조해 가며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만들었습니다.

이 성경 번역본은 제네바에서 작업한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 성경’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제네바 성경은 최초의 해설 성경이었습니다.

성경 본문 좌우에 해설이 빽빽하게 달려 있는데,

이것은 성경 본문을 칼뱅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부수적으로 설명한 내용이었습니다.

훗날 이 제네바 성경의 칼뱅주의 해석은 영국의 성경 번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네바 성경(1560) 마태복음 1장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이나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

저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읽은 성경이 바로 제네바 성경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에 이 성경을 인용했고, 그 횟수는 천 번이 넘습니다.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져갔던 성경도 제네바 성경이었습니다.

제네바 성경을 가지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 중에

존 엘리엇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그는 원주민 앨곤퀸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고,

14년 동안 그 부족의 언어인 나틱 방언을 공부했습니다.

엘리엇은 원주민들의 언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글자가 없던 그들을 위해 알파벳을 이용한 문자 체계를 만들어 주었고

나틱 방언 사전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든 문자 체계로 성경 전체를 나틱 방언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작업은 1663년에 완료되었고,

나틱 방언 성경책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인쇄된 성경이 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성경이 영어로 인쇄된 것은 그로부터 120년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한 부족을 위한 번역 작업에 너무 많은 시간과 수고와 돈이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경을 접한 앨곤퀸 부족의 일부는 토속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새로운 마을을 형성했습니다.

이 마을은 ‘기도하는 마을’로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앨곤퀸 성경은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앨곤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앨곤퀸 부족에게 설교하는 존 엘리엇

 

영국에서는 메리 여왕의 사후에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정치적 균형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지만, ‘최고 수장’ 대신

‘최고 통치자’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재위)

 

이것은 여자로서 교회의 수장이 될 경우에 받을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메리 여왕 때의 가톨릭 주교 몇 사람을 복귀시키는 동시에

해외로 망명한 개신교인들이 안전히 돌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올 때 제네바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성공회 주교들은 제네바 성경이나 대성경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성경을 번역하고서 ‘감독 성경(Bishop’s Bible)’이라고 불렀습니다.

감독 성경의 표지 한가운데에는 여왕의 그림을 넣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여왕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만들었던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표지에는 “하나님, 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GOD SAVE THE QUEENE).”라고 적었습니다.

이 성경은 잘 번역된 성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널리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감독 성경(1568) 표지에 여왕을 그려 넣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여왕의 먼 친척이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가 영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개신교인이었기 때문에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에게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공회 교인들은 제네바 성경의 칼뱅주의적 해석을 문제 삼았고,

개신교인들은 감독 성경을 문제 삼아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604년에 제임스왕은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성경 번역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이 번역 작업에 포함시키고자

영국 전역에서 최고의 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언어학자, 신학자 등으로 구성된 54명의 학자들을 6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두 그룹은 옥스퍼드에, 두 그룹은 케임브리지에,

두 그룹은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배치했습니다.

학자들에게는 번역 작업을 위한 지침도 주어졌습니다.

먼저 감독 성경을 토대로 하되 다른 번역본이 더 낫다고 합의될 경우

가장 나은 원문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사용될 번역본에는 틴들의 신약성경,

매슈 성경, 커버데일 성경, 대성경, 제네바 성경이 포함되었습니다.

또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명이나 주석을 빼기로 했습니다. 한 그룹이 번역 작업을 완료하면

다른 그룹으로 보내어 검수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여섯 그룹 모두 다른 그룹이 번역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후 각 그룹에서 두 명씩 선정하여 번역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편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명을 선정하여 최종 편집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7년 동안의 작업을 마치고 완성된

‘킹 제임스(King James Version, KJV) 성경’이 161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1603~1625 재위)

 

킹 제임스 성경은 이처럼 철저한 편집 과정을 거친 번역본이었음에도

초판 인쇄본에서 여러 가지 실수가 발견되었습니다.

유명한 실수 중 하나가 출애굽기 20장 14절에 부정의 뜻을 가진 단어

‘not’이 빠져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가 “간음할지니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작은 실수들 때문에 킹 제임스 성경은

1611년부터 1769년까지 여러 번 개정하여 인쇄되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이 널리 퍼지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결과적으로 이 성경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전, D. L. 무디 외에도 19세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대영 제국의 식민지 곳곳을 누볐던 수많은 영국 선교사들이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책중의 책 -킹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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