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마추픽추의 다양한 모습이다.
촬영하는 각도에 따라, 구름의 흐름에 따라,
제각각 촬영하는사람의 기기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보이는 마추픽추~~
더 늦기 전에 꼭 한번 가고 싶은곳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요새 도시다.
15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잉카 문명의 제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수면에서 2,430m나 되는 산맥의 정상 위에 위치해 있다.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80km 정도 떨어져 있고,
우루밤바강이 도시가 있는 산맥 아래를 꺾어 흘러가고 있다.
마추픽추는 1450년 즈음에 지어졌고,
1세기 후에 스페인의 침략과 비슷한 시기에 버려졌다.
이후 주변 현지인들에게만 간간히 알려져 있었고,
1911년에 미국의 탐험가 하이엄 빙엄이
다시 발견해 내기 전까지 세상에서 잊혀져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파차쿠티 황제가 이 요새 도시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잃어버린 도시의 이미지로 잉카 문명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불려진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페루 정부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시켜 둔 것으로 1976년에 전체 유적지의 약 30% 정도가 복원되었고
현재도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죽기 전에 한번 가봐야 할 여행지라고 세상이 극찬하는 마추픽추
고대 잉카 언어로
마추픽추의 '마추'는'옛', 혹은 옛날을 뜻하며,
'픽추'는 고대 잉카인들이 마약 용도로 사용하던 코카잎, 피라미드 등을 뜻한다.
때때로 '오래된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리기도 한다.
1450년~60년대에 지어졌는데 이 도시의 건축은 2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감독하였다.
파차쿠티와 투팍 잉카 유팡키다. 고고학자들은 파차쿠티 황제가 군사 원정을 끝낸 후,
황제 전용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나타난 이후, 마추픽추에 살던 거주민들이 스페인에서
전해온 천연두와 같은 질병들로 인해 모두 사망하였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추픽추가 황제의 궁전이었을 당시,
이곳에는 약 750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다수는 이곳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황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이었다.
마추픽추는 일반적인 개념의 도시가 아니라,
황제의 개인용 별장이나 임시 대피소 비슷한 용도의 도시였다.
약 750여 명 정도의 주민들 모두가 황제의 수발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야나코나',
즉 사용인들이거나 종교제례를 위한 사제들이었다.
실제로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조사해본 결과,
유골들이 마추픽추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고 페루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기생충에 걸려있거나 마추픽추 지역에는 서식하지 않는
맹수들의 흔적이 발견되는 등 마추픽추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마추픽추가 정상적으로 사람들이 대를 이어 함께 살아가는 정주(定住)
개념의 도시였다면 불가능한 일로,
즉 마추픽추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마추픽추의 농부들은 인위적으로
산을 깎아 만든 인공 테라스에서 계단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 계단식 농법은 경사가 심해 조금만 비가 와도 토양이
다 쓸려내려 가버리는 안데스 지방에서 상당히 효율적인 방식의 농법이었고,
실제로 물을 가둠과 동시에 비옥한 토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 예상외로
생산량이 굉장히 많았다.
테라스를 지을 때에는 가장 아래에 거대한 암석들을 쌓아 토대를 만들었고,
위로 쌓아나갈수록 크기가 작은 돌들을 올렸으며 맨 위에는 모래와 자갈을 얹고
그 위에 산꼭대기에서 가져온 흙들을 덮었다.
다만 잉카인들의 기술력이 완벽하지 못해 계단식 밭들에서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 농작물과 함께 밭마저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일이 잦았고,
산비탈이 아예 무너져내려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시 복구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그 높은 계단식 밭들에 대체 어떻게 물을 공급했을까 하는 것인데,
마추픽추가 위치한 지방의 1500년대 당시 연 강수량은 약 1,800mm 정도였고,
이는 옥수수 등 주 농작물들이 매년 필요로 하는 강우량보다 살짝 더 많은 수준이다.
따라서 마추픽추의 농부들은 굳이 물을 위로 끌어올릴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수로 공급시설 따위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내린 빗물을 밭에서 빼내기 위해 개수로를 만들었다
잉카인의 기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산 위부터 산 아래층까지 물이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정교한 수로를 만들었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웅덩이 하나 생기지 않고 전부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그 수로는 특별한 손질 없이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관리하는 밭들은 꽤나 생산량이 좋았으나,
다만 4.9 헥타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밭의 면적으로는
도저히 750여 명에 달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고,
때문에 마추픽추는 상당 부분의 식량을 외부에서도 조달을
받아왔었던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인근의 계단식 밭에서 감자, 옥수수 등을
길러 먹었으며, 산아래의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와 먹기도 했다.
산바람을 이용한 자연 냉장고를 개발해서 널리 쓰고 있었다.
고산 지대 특유의 환경을 이용한 것이긴 하지만,
주어진 자연환경을 이해하고 응용한 것이다.
서양문명보다 앞서서 음식물을 저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서구보다 500년 앞선 기술로 감자를 6년간 썩히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잉카 고전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접착제 모르타르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돌과 석재들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고 태양의 신전의 경우 거대한 자연석을 거의 손대지 않고 지은 건물이다.
철제도구가 전혀 없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면도칼 하나 들어가지도 않는 정교한 석조건축, 조각술이 이용되었다.
자연석으로 만든 오차가 없는 나침반과 해시계가 있다.
물론 계급사회답게 물과 물자는 상층의 왕/귀족/사제들의 영역을 먼저 거쳐오며,
이후 하층으로 오면서 서민, 노예 등 계급 순으로 제공된다.
잉카인들은 동물들을 길러 도축해 먹었고,
이 것이 생선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마추픽추에서 육류를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도 마추픽추의 한 무덤에서 한 명의 인골이 6마리의 개들과 함께 발굴되었는데,
아마 애완동물이나 식량으로 삼기 위해 개도 함께 길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라마나 알파카 등의 동물들도 함께 데리고 왔는데,
참고로 이 동물들이 약 해발 4,000m 정도의 높은 고산지대에 자생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해발 2,400m 밖에 되지 않는 마추픽추 지역에서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라마와 알파카들을 데려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제한된 자원이 계급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분배되는지 잘 보여주는 형태로,
이러한 도시모델은 세기말 막장 도시의 표현에 아주 잘 애용된다.
다만 이 도시가 약 80여 년간 사용된 이후
버려진 것을 보아, 잉카 황제들에게 대대로 내려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장소, 다른 느낌의 마추픽추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술이다.
추운 계절이 찾아오면 마추픽추의 인구는 더더욱 줄었다.
사용인들은 산아래로 내려가 계절을 보내고 다시 올라왔고, 그동안에는
사제들을 포함한 최소한의 인력들만이 남아서 도시를 유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마추픽추 뒤편의 저 산은 사람의 얼굴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오똑한 코부분이 잉카인들이 태양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와이나 픽추'다.
마추픽추의 발견자는 미국 예일대의 교수 하이럼 빙엄이었다.
빙엄은 1909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동안 페루의 잉카 제국
유적들을 답사하며 잉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1년에 잉카 제국의 최후의
수도이자 항전지인 빌카밤바를 조사하기 위해 페루 원정팀을 꾸린다.
빙엄은 16세기의 기록에서 빌카밤바가
'샘물이 솟아 나오는 거대한 백색암석' 위에 있다는
내용을 보고 이를 토대로 조사를 계속했고,
그러다 한 원주민 농부로부터 고대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루밤바 계 곡을 조사하던 중 마추픽추의 계단식 밭에서 토지를
경작하던두 원주민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빙엄은 그 가족들 중 꼬마 아이의 안내를 따라
올라선 곳에서 마추픽추를 발견하고 이를 학회에 공식으로 보고했다.
당시 마추픽추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일부
치워놓은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식물에 뒤덮여 있었으며,
이 때문에 발견 직후 빙엄은 마추픽추의 규모나 자세한 세부 내용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한 유적의 모습은 기록 속의 빌카밤바와 흡사한 부분은 없었고,
결국 빙엄은 자신이 발견한 곳이 빌카밤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1912년 하이엄 빙엄과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함께 마추픽추를 찾아왔다.
빙엄 교수는 1912년에 예일대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그리고 페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마추픽추를 재방문했고,
이번에는 4개월 동안 머무르며 마추픽추 유적들을 모두 정리했다.
빙엄은 이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정리하고
일부를 미국의 연구실로 실어 보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초기만 해도 빙엄을 호의적으로 바라봐주던 원주민들과
페루의 지주들이 점점 빙엄을 아니꼽게 여기기 시작했고,
페루의 언론에서도 민족주의를 부채질하며 미국인들이
페루의 보물을 훔쳐가고 있다는 논조로 기사를 써내며 여론 몰이를 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새로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구름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여
단 한번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고 살아있는 마추픽추~★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봐야 할 여행지라고 세상이 극찬하는 마추픽추'
한번 가본 사람은 "언제 또 가보나~~" 하는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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